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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새난슬 Sep 29. 2023

젠더프리 캐스팅에 대하여, 연극 「오펀스」를 중심으로

고전문예론 과제…

인간과 인간의 서사

- 젠더프리 캐스팅에 대하여, 연극 「오펀스」를 중심으로


젠더프리 캐스팅

희곡 ‘Orphans’(이하 ‘오펀스’)는 1970년대 미국 필라델피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고아 형제인 ‘트릿’과 ‘필립’, 그리고 시카고 출신 갱스터 ‘헤롤드’라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트릿’은 좀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고 동생 ‘필립’이 세상으로부터 상처받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 나머지 그가 글을 읽거나 외출을 하면 폭력을 저지른다. 그러던 어느 날, ‘트릿’은 시내 술집에서 술에 취한 ‘헤롤드’를 납치한다. 이후 ‘헤롤드’가 ‘트릿’에게 경호 및 수행 비서라는 일자리를 제안하고, 세 사람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극의 주요 줄거리이다. 원작 희곡에서는 세 인물 모두 남성으로 설정되었고, 여성은 인물들이 언급하는 ‘엄마’와 ‘금발에 빨간 하이힐을 신은 여자’뿐이다. 이들은 실제로 관객이 만나볼 수 없다. 본 희곡은 198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초연된 후, 2019년 한국에서 최초의 '젠더프리' 캐스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캐릭터의 성별에 따라 같은 성별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방식을 이어왔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국내 연출가 김태형의 제안으로 연극 <오펀스>로서는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성사되었다. 오펀스의 원작자 Lyle Kessler는 초연부터 30년 이상을 남성만을 캐스팅했을 때 아무 문제가 없었고, 이제 와서 여성을 캐스팅하는 시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며 김태형 연출의 젠더프리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다. 그로 인해 <오펀스>의 국내 초연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남성 배우만이 캐스팅되어 진행되었으나, 이후 2019년에 돌아온 재연에서는 원작자로부터 젠더프리 캐스팅을 허락받는다. <오펀스>의 젠더프리 캐스팅이 국내에서 최초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김태형이 몇 년간 원작자를 설득하며 젠더프리 캐스팅을 밀어붙인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펀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남성 배우만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것. 둘째, 여성의 목소리로 <오펀스>의 이야기가 전달될 때 또 다른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 셋째, 재능이 출중한 정경순, 최유하, 최수진 같은 배우들이 이런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끊임없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Lyle Kessler는 ‘헤롤드’ 캐릭터를 마초 성향이 강한 캐릭터로 설정했지만, 국내의 연극 <오펀스>에서는 해당 캐릭터 배역을 맡은 추상미 배우가 ‘상처입은 치유자’로 해석하며 캐릭터의 양상이 조금 달라진다. 거칠고, 폭력적인 설정이 단지 ‘여성’ 배우에게 갔다는 이유로 달라졌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해당 배우가 캐릭터 해석에 대해 명확한 해석 지점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남자’를 연기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남성적 에너지 표출보다는 고아로 자라 조직의 ‘세컨드’까지 올라간 사람의 내공, 연륜 표현이 더 중요하다고 봤어요. 해롤드는 신문을 끼고 살고 경제 흐름을 읽는 ‘브레인’이니까요.”


김태형이 내세운 젠더프리 캐스팅의 필요 이유는 현 시대의 페미니즘 정서와 깊게 맞닿아있다. 비단 공연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여성의 이야기가 남성의 이야기보다 가지수가 적고 업계의 높은 사람들의 인식에서는 다소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여성의 이야기는 ‘여성서사’라는 이름으로 따로 묶여 호명된다. 이는 그만큼 여성들의 이야기가 발화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인 것과 동시에 ‘여성 서사’라는 이름 아래에 어떤 범주화된 규격의 이야기가 또다시 생성되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

‘여성 서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장르를 불문하고 여성 소비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담론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성 서사라는 단어가 성립한다는 기준은 소비자 개개인마다 다르고, 어떤 공통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세부적인 요소까지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은 또 하나의 검열로 이어지기도 한다. 완벽한 여성 서사란 무엇인가? 그 질문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고,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애초에 특정 젠더를 기준으로 서사의 완벽성을 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완벽한 여성 서사의 기준과 그러한 창작물을 채에 거르듯 골라내는 데에 지친 소비자들은 이미 업계에 존재하는 한 가지 성평등 기준점을 가져왔다. 미국의 여성 만화가 Alison Bechdel이 고안한 성평등 테스트인 벡델 테스트이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이름이 있는 여성이 두 명 이상 등장할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그 대화 내용이 남성과 무관한 것.”

그렇다면 본래 캐릭터의 성별이 남성이었지만 여성 배우가 배역을 맡으며 여성으로 변경된 <오펀스>는 여성 서사일까? 오펀스 팬덤은 ‘그렇다’고 받아들인다. 성별로서의 섹스가 바뀌며 젠더도 함께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트릿’ 역할을 맡은 최유하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캐릭터의 기본 설정에 다음과 같은 해석을 부여했다.

“배우들끼리 만들어놓은 설정은 이래요. 일단 트릿과 필립은 자매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일찌감치 집을 나갔고 어머니도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죠. 트릿은 딱 하나 남은 가족인 필립과 떨어지기 싫어서 제도의 도움도 거부해요. 그래서 필립을 집에 가둬놓고 좀도둑질을 하면서 단둘이 살아가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세상에 부딪혀본 결과, 낮은 계급의 여자로 살아가는 게 불리하단 걸 깨닫게 돼요. 그래서 긴 머리나 2차 성징이 왔을 때의 신체적 특징을 하나하나 없애거나 가리게 됐죠. 필립한테도 '형'이라 부르게 하고요.


헤롤드도 마찬가지예요. 여성으로서 갱스터 무리에 살아왔지만 그 속에서도 유리천장이 있었겠죠. (…) 저희가 이런 설정을 해놓긴 했지만 남자, 여자보다는 그냥 인간으로서 트릿, 필립, 해롤드를 봐주시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김태형 연출이 젠더프리 캐스팅을 고수한 이유는, <오펀스>를 남성이 아닌 인간의 이야기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가 침입해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던 인물의 목숨을 빼앗고, 그로 인해 상실을 경험하는 것은 물론 남성들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최유하 배우가 말했듯 우리는 그들을 성별 이후의 인간이 아닌 성별 이전의 ‘그’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성별을 떼어놓고 인물을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캐릭터들이 ‘남성’이었을 때는 단지 ‘인간’의 이야기로 읽혔던 그들의 서사가, ‘여성’으로 바뀌었을 때는 ‘여성’이라서 겪어야 하는 부차적인 이야기들이 덧붙여지고 관객 역시 그 지점을 투과하며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만, 이 세계의 현실과 완벽히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여성’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필요가 분명히 있다. 그렇게 특정 성별에 덧씌워진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벗겨내는 과정이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되어야, 이후에는 ‘여성 서사’라는 단어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연극 및 뮤지컬에 등장한 여성 캐릭터 양상

“박병성 평론가는 공연 속 ‘남성성과 여성성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은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강화했으며’ 업계 내부 상황 역시 ‘유리천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공연계 상황을 지적했다.”

국내 창작으로 큰 성공을 거둔 대형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2014년 초연이 올려진 뒤, 사연이 진행된 2021년까지도 하나의 비판점을 피하지 못했다. 바로 여성 캐릭터를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고 소모적으로 사용한다는 지적이다. 본 극에서 이름이 있는 여성 인물은 '줄리아/까뜨린느', '엘렌/에바'로 그 수는 총 4명이지만, 전 배역 1인 2역 캐스팅이라는 극의 의도에 따라 앙상블을 제외한 주조연으로 여성 배우는 단 2명만이 등장한다. 인물 ‘줄리아’는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약혼자로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그를 기다리는 헌신적인  인물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빅터’가 자신을 외면하고 연구실로 향하자 여전히 마음을 노래하고, 결혼식을 올린 이후에는 ‘괴물’의 복수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으로 퇴장한다.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까뜨린느’는 ‘괴물’과 함께 격투장의 노예로 살아가다 그를 배신한 뒤 살해당하며 퇴장한다. 다른 여성 인물인 ‘엘렌/에바’ 역시 앞선 두 인물의 ‘성녀’ 및 ‘창녀’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는 모양새가 크게 다르지 않다. ‘엘렌’은 ‘빅터’의 누나로, 일찍 사망한 부모를 대신해 엄마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줄리아’와 마찬가지로 괴물의 희생양이 되어 사망하는 것으로 퇴장한다. ‘에바’는 ‘괴물’이 붙잡힌 격투장의 주인으로 ‘괴물’을 철저하게 괴롭히는 사디스트 적인 면모를 보인다. 격투장의 주인이라는 역할을 맡았으나 극의 전개는 그의 남편인 ‘쟈크’가 이끌어가므로 어떤 주체성을 가진 인물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괴물’에게 고통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곧바로 퇴장하기 때문에 단지 보조적인 역할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다. 극을 이끌어가는 것은 ‘빅터’와 ‘앙리/괴물’로, 그 이외의 남성 인물들 역시 그들을 보좌하거나 그의 캐릭터성을 받쳐주는 역할만 하고 퇴장하지만 그들이 ‘창남’이나 ‘성남’이라는 프레임에 속한다는 평가는 거의 없다. 왜 여성 인물에게만 ‘창녀’ 혹은 ‘성녀’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부여되고, 또 해당 여성 배우는 계속해서 두 가지 인물만을 연기해야 하는 것일까? 이는 또 다른 유명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잭 더 리퍼>도 마찬가지로 부딪히고 있는 하나의 비판점이다. 연극 및 뮤지컬이라는 장르 이외에도,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를 보좌하는 역할에 그친다는 수많은 비판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하나의 서사가 진행됨에 있어서 ‘여성’이 도구화 었다는 지적이다. 그러한 지적은 이미 수많은 실 관람객이 지적해 왔음에도 중소극장을 제외한 대극장에서는 여전히 변화가 미미한 실정이다.


젠더프리 캐스팅에서의 남성 배우

국내에서 최초로 젠더프리 캐스팅이 이루어진 공연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이다. 남성 캐릭터인 ‘헤롯왕’에 여성 배우 ‘김영주’가 캐스팅된 것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이외에도 수많은 극이 기존에 남성 캐릭터를 내세운 그들만의 서사와 리그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여전히 캐릭터의 성별은 남성이지만 여성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시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 된다.

뿐만 아니라 뮤지컬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원작에서 모두 남성 인물로 등장하지만 공연에서는 여성 및 남성 배우가 골고루 캐스팅 되었다. 인물 자체의 성별(남성)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은 여성 배우인 것이다. 이는 연극 <비평가>도 마찬가지다.

이후 공연계에서 젠더프리란 캐릭터의 기존 성별에 상관없이 여성 배우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공연계가 젠더프리 캐스팅을 채택하기 시작한 흐름에서, 팬덤의 반발이 시작된 것은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캐릭터에 남성 배우가 캐스팅될 때다.

뮤지컬 <해적>의 등장인물인 ‘앤’과 ‘메리(마리아)’는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에게 억압적인 세계관에서 가명으로 남성의 이름 ‘앤소니’와 ‘마르코’를 사용한다. 이후 두 사람이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본래 이름을 밝히는 장면이 극의 주요 장면으로 꼽힌다. 이런 캐릭터를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캐릭터의 취지에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연극 <오펀스>는 세 명의 인물이 모두 여성 혹은 남성으로 단일한 성별의 캐스팅이 이루어지다가, 단 며칠간 등장 배우의 성별을 섞는 ‘크로스 캐스팅’을 진행했다. 이는 트위터 등지에서 오펀스 팬덤에게 큰 비판을 받았는데, 비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언어 폭력과 신체 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해당 극에서 피해자의 위치에 있는 동생을 여성 배우가 연기하고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형을 남성 배우가 연기한다면 그것은 현실의 폭력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고,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젠더를 가진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그 모습을 공연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트릿’이 ‘필립’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것의 밑바탕은, 극에서 드러나는 서사로는 결국 ‘사랑’이었다. 더군다나 극 후반부에 ‘트릿’이 ‘필립’의 소유물을 파괴하고 목을 조르는 장면이 있기에 그 우려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서의 위계, 젠더 간 폭력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극을 관람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비판에도 크로스 캐스팅 일정은 변동 없이 진행되었으며, 후반부의 폭력적인 장면은 목을 조르는 연출을 제거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렇듯 젠더프리 캐스팅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에 대해 공연 칼럼니스트 조연경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젠더프리'라는 용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젠더프리는 직역하자면 젠더가 없다는 뜻으로, 말 그대로 무성이거나 성별로 사람을 구분짓지 않겠다는 뜻이다. 정체성으로서의 젠더가 다양하게 세분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 모든 젠더의 차이를 인식하기 보다 젠더를 벗겨내고 사람 그 자체를 중립적으로 보자는 의미로 들린다. 더 단순하게 말하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을 떠나서 보면 다 같은 사람이니 구분하지 말자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남성 캐릭터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거나, 남성 캐릭터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꿔 새로운 관점으로 극의 메세지를 전하는 시도를 단순히 젠더에 상관없이 캐스팅하는 방식과 구분하지 않고 '젠더프리 캐스팅'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 그리고 어떤 작품이든 잘못된 성별 고정관념을 답습하지 않는 건 젠더프리와 상관없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여성 서사’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젠더프리 캐스팅’역시 그 단어가 가진 의미, 단어가 사용되는 상황에 대해 다시금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현실에서 젠더 간 위계와 폭력이 사라지고 생물학적 성별과 젠더에 관계없이 모든 이야기가 그저 인간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일 테다. 물론 그런 미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과거에 여성 인물까지도 당연히, 자연스럽게 남성 배우가 배역을 맡았던 때를 상상하면 지금은 충분히 많이 변화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제와서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사람들의 인식 변화로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한 목소리들이 앞으로의 더 많은 길을 열어갈 것이다.


젠더프리 캐스팅 이후

연극 <오펀스>의 젠더프리 캐스팅이 국내에서 이루어진 뒤, 국내 재연 공연 이후, 원작자 Lyle Kessler가 미국에서도 젠더프리 캐스팅을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비추었다. 기존의 극이 남성들의 이야기로 태어났어도, 원작자가 남성들의 이야기라 못 박았다 하더라도, 인간과 인간의 서사는 처음 태어난 지점에서 멈추지 않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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