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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n 14. 2023

생존 신고 리뷰

 일말의 희망도 없는 당신에게 쓰는 편지

 리뷰는 중요하다.


 하물며 한 끼를 때우기 위한 식사를 주문할 때조차도 한편에 마련된 리뷰를 통해 과거에 음식점을 미리 경험한 다수의 의견을 참고한다. 음식의 품질이 어떠한지. 가성비가 얼만큼 좋은지. 위생 상태는 양호한 지. 직접 부딪히며 스스로 경험을 쌓아야만 했던 예전과 달리 비약적인 시대 발전의 특혜로 여러 가지 사례를 검토하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셈이다.


 개인적인 고찰이지만, 그것은 음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인 세 가지 항목 '의식주'의 '식'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배탈로 고생을 할 수도 있는 건 물론, 때때로 좋은 식사는 하루의 기분 전체를 총괄하기도 한다.

 그런데 '삶'은 어떠한가. 사람의 '목숨'은 또 어떠한가. 사람이 기본적으로 건강하게 살아있지 않다면 의식주의 'ㅇ'조차 만끽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째서 사람의 생사를 가르는 '정신 건강'이라는 주제를 여전히 꺼리고 경계하며 대중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걸까.


 이것은 나의 생존 신고 리뷰이다.


 우선 리뷰라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경험에 의해 적힌 글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단순히 배달 음식에 빗대어만 생각해도 좋은 평가로 인해 적힌 리뷰를 보고 음식을 주문했다가 최악의 경험을 하는 경우도 있고 별 한 개짜리 리뷰가 적힌 음식점이 나의 단골 식당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단언할 수 있는 건, 내가 이 글을 '별 다섯 개짜리 리뷰 이벤트'로 서비스 메뉴를 선물 받기 위한 목적을 갖고 적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대기만성형 조울증 환자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로마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대기만성은 영어로 '늦게 피는 꽃'이라고도 한다. 나의 우울과 조울은 미미한 불행에서 시작하여 죽음의 꽃을 피웠다. 나의 병은 빌드업이 잘 된 병이다. 굳이 인생에서 겪을 가치가 없던 사적인 피해를 켜켜이 쌓아 만들어 낸 궁극의 독약이었다.

 내가 흔히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국가 기관인 정신 건강 복지 센터나 자살 예방 센터에 이름을 등록한 것은 고작 2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서른을 앞두고 있는 세월을 생각하면 혼자 20년이 넘는 시간을 심각한 자해와 자살 시도의 실패로 버텨낸 셈이나 다름없다.


 이미 오래전에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건 나의 두려움에 기인한 주저가 원인이다.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막상 도움을 받고자 하니 스스로를 비난하게 되었다. 별 것도 아닌 일을 갖고 애꿎은 센터 사람들을 귀찮게 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도움조차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인데 그들이 나에게 관심과 시간을 쏟는 것 자체가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전에 무수히 겪었던 것처럼 혹시나 잘못된 사상을 가진 상담사를 만나서 또 다른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런 걱정과 불안을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음으로 공감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두 부류에게 동일한 의견을 제시하고 싶다. 당연하다는 말이다.


 이런 종류의 고독과 불안과 상처와 우울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만은, 정말로 그런 종류의 아픔에 공감할 여지없이 건강하게 살아온 사람의 입장에선 당연히 어리석게 보이리라. 그것은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축복이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스스로의 슬픔조차 억지로 삼키고 애써 강인한 척 버티지 않으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다.

 딱딱하고 뻣뻣한 나뭇가지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러진다. 하지만 유연하고 얇은 나뭇가지는 큰 충격에 흔들림이 있을지언정 부러질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진다. 아파트나 빌딩 같이 고층 건물을 설계할 때 일부러 큰 진동에 건물이 흔들릴 수 있도록 내진 설계를 고려하며 건축을 하는 것처럼, 다분히 과학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인간에게도 내진 설계가 필요하다 여긴다.

 구부러지고 흔들린다는 건 굳건히 버티고 다시 중심을 잡기 위한 반동에 불과하며, 보기엔 위태로울지 몰라도 건강하고 당연한 반응이다. 아픔을 토로하고 도움을 받는 행위는 나약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용기를 동반하는, 유연한 행위이다.


 또 다른 이유로 도움을 주저하는 당신에게 나는 코끼리와 개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코끼리가 아파트 2층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죽는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없는 진실이다. 코끼리는 태생적으로 굉장히 무거운 무게를 가진 생물이다. 물체의 충격력을 계산할 때는 운동하는 물체의 무게가 클수록, 또 가속도가 높을수록 충격이 커진다. 그러니까 2층에 올라선 코끼리는 무게가 크다는 지점에서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미는 어떨까. 개미는 18층 높이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선천적으로 무게가 가벼운 생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2층 높이에서 죽는 코끼리를 비난할 수 있는가. 코끼리의 구조 자체가 잘못 설계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개미가 더 우월한 생명체라고 추켜세우는가. 개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생각하는가.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동물의 유전이나 생태 보다도 복잡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완벽히 재현한 실험처럼 똑같은 조건의 불행한 경험을 겪었다고 한들 개인이 타고난 기질이나 환경에 따라서 누적되는 무게는 천차만별일 수 있다. 그런 마음의 무게는 극도로 개인적이고 추상적이라, 개미와 코끼리처럼 객관적으로 무게를 잴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개미는 18층의 높이에서 떨어져도 생존할 수 있지만, 코끼리는 2층 높이에서만 떨어져도 죽는다. 그리고 개미는 그 사실을 토대로 코끼리를 무시하며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야기에서 잘못된 게 있다면, 그들을 낙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넣은 작위적인 설정이 아닐까.

 어떤 불행이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하는 사건일지언정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오가는 고통일 수 있다. 마음의 무게는 객관적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당신이 죽을 만큼 아프다면, 그 경험만이 옳은 것이다.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중력처럼, 사람은 환경과 기질의 도움으로 걸음마를 떼어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것이다.

 당신의 아픔은 당연하다.


 나는 세상에 이미 숱하게 나와있지만 사람들이 굳이 찾아보지 않는 위로의 글처럼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다. 극심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글자 몇 개를 읽는 것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나, 내가 가진 능력 중에 가장 괜찮은 것이 글을 쓰는 재능이다.

 이것은 아주 주관적인 리뷰이지만 어디에서 과거의 나와 같이 고민에 빠져있는 한 사람에게라도 전달되어 미미한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좋겠다. 이 글의 목적은 그것이 전부이다.


 적어도 과거의 나는, 이런 종류의 글을 접해본 적이 없다. 봤음에도 모른 체했다.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괜찮은 방법이라는 문구와 선전이 도처에 깔려있는데도 불구하고 진정성 있게 '나에게 필요한 말'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세상 모든 것에 비관적이었다.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 같은 건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터무니없이 이상적이고, 착한 척을 하려는 목적으로 저 세상 사람들이 멋대로 적어놓고 도덕적 우월감을 취하려는 선전 따위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나에겐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는다. 도움을 받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라는 말을.


 알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사칙연산처럼 습관적으로 외우고 있지만 결코 와닿지 않는 말이다.

나만 해도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공익 광고를 살면서 수 백번은 봤는데, 거의 20년 가까이를 인생은 혼자라고 생각하며 살았으니까. 심지어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다. 모두가 그렇다. 우리가 억울한 이유는 착실하게 죽어가는 와중에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무엇이든 시도해 봤지만 어김없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희망을 갖고 교내 상담사에게 사실을 토로하였지만, 상담사의 그릇된 태도와 언행으로 죽을 결심에 도달한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스스로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안다.


 나의 사례가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시도'조차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결과이기도 하다.


 현재 나는 자살 예방 센터에 한 달에 한 번 방문해서 상담을 하고 있다. 그들은 슈퍼맨이나 구세주가 아니라 사회적인 복지를 명목으로 직업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의 삶을 완벽하게 역전시키거나 빠진 늪에서 팔을 잡아 끌어내는 수준의 놀라운 기적을 실행하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이기에 '사람'만이 제공할 수 있는 따스한 공감과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내가 매달 센터에 방문해서 나누는 이야기는 놀랍도록 거창하고 극적인 것이 아니라 평범한 '생존 신고'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도움이 된다. 시답지 않은 조언과 위로를 배제하고 온전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주기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믿기 어려울 만큼 안정된 경험이다. 당신이 금전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면 병원비의 부담을 줄여주는 복지 서비스를 신청할 수도 있다. 명상과 미술 치료와 같은 프로그램도 마음을 환기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다. 프로그램 자체가 선사하는 위로도 있었지만, 그곳에선 무엇보다 나와 같은 곤경에 처해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체험으로 알아본 셈이다.

 하지만 위의 사례는 내가, 당신이, 우리가 먼저 문을 열고 걸음 하지 않으면 알 수 조차 없는 일이다.


 죽음을 설계하는 일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방식과 과정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무너질 만큼 지친다. 정말 극심한 우울에 시달릴 때는 죽고자 하는 의지조차 조용히 말살되기도 한다.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져있을 때에 더욱 그렇다.

 그때는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싫어지고 귀찮아져서 스스로가 게으른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런 자신을 비판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그런 상황에 놓여있다면. 언젠가 놓일 수밖에 없게 된다면. 주변에 이와 같은 절망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나의 리뷰를 토대로 조금의 용기를 내보는 건 어떨까 조심스레 제안해 본다. 안 그래도 고통에 사무친 사람에게 더욱 힘을 내보라고 하는 건 잔인한 처사다. 그러니까 나는 힘을 내라는 쓸데없는 응원을 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내 말에 아주 사소한 설득력이 있었다면, 극단적이고 처절한 계획이 조금이나마 망설여진다면, 마주한 현실이 모래를 삼키는 것처럼 텁텁하고 괴로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벗어나고 싶을 만큼 아프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억울한 마음이 든다면, 나와 함께 손을 살짝 뻗어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도 시끄러워 당신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시커먼 재앙 속에 파묻힌 당신의 손 끝이라도 눈에 보였으면 좋겠다.

 당신이 아직 그곳에 있노라고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아직 존재하고 싶노라고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두렵고 조바심이 나서 병원, 센터, 복지기관에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가까운 주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나의 주변을 포함한 보통의 주변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런 종류의 일을 다루는 것에 능숙한 사람은 정말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위로를 전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신이 완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구조 요청을 할 의지조차 들지 않는 것처럼, 모두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위로와 배려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 평균적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이 리뷰에서 공인된 병원, 센터 등 전문적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우선적으로 요청하기를 권장한다. 제 아무리 마음이 가까운 친구, 가족 등의 관계에 놓인 사람이라도 전문적인 지식이 동반되지 않으면 본의 아니게 당신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꺼낼 수 있다. 자각하지 못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도움을 주려고 할 가능성도 있다. 적어도 병원이나 복지 기관, 센터 등에서 직업으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도움을 건네는 일을 공부한 사람들이다. 직업적으로 현장에 놓여 실제 사례를 숱하게 접하면서, 듣는 자세와 배려하는 자세를 익힌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또한 어김없이 상처를 받거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경우에도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 보다도 문제를 의식한 다음 당신을 위해 빠르게 시정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당장 오늘이라도, 며칠 뒤라도, 내내 묻어두었다가 몇 년이 지나더라도 아직 늦지 않았으며 이르지 않다.


 우리는 인위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유명한 명화와 같은 예술 작품처럼 인위적이지만 보기에 좋은 것들이 있다. 어떤 건물이나 구조물은 주변의 풍경과 전혀 어우러지지 않아 이질적이다. 당신이 뻗은 손길은 어떤 인위적인 인연을 맺을 것인가. 우리는 아직 모른다. 그 인연은 어쩌면 굉장히 예쁠 수도 있다. 물론 흉측한 모형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도하기 전엔 도무지 알 수 없다.

 결과는 모르지만 인연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라는 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끝이라는 이름의 미지를 향하는 당신에게.

어차피 모르는 건 똑같지 않은가. 한 번 정도는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슬을 끊는 죽음도, 생명을 연장하는 고리도 어차피 동일하게 결과를 모르는 채 몸을 던지는 일이라면.

이런 방법은 어떠한가. 이것은 손가락 끝의 작은 접촉 한 번으로 시작할 수 있다.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1577-0199 또는 1393

한국 생명의 전화: 1588-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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