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서울로 3편 끝!
뜨거운 여름이 아직도 절절 끓는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벌써 20여 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방학이 2주가 남았다. 남은 기간이 꽤 되는데도 아이들은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아쉽다고 방학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놈은 팔깁스를 하는 바람에 그 좋아하는 자전거도 못 타고 물놀이하러 바다랑 수영장도 못 가니 좀이 쑤시는 것이고, 집순이를 자처하는 딸은 평소에도 집에서 놀기를 제일 좋아하는터라 지나가는 날이 아쉬운 것이다.
나도 그렇다. 이 더운 여름, 더 뜨겁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서울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아이들은 명동 나들이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뜨겁게 시원했던 서울의 거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여행 첫날 남산, 여행 둘째 날 성균관과 미술관 (전쟁 기념관도)을 돌아다닐 땐 분명 폭우 예보가 있었음에도 날씨가 쨍했다. 하지만 셋째 날은 아침부터 변화무쌍한 날씨였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었다가, 그 사이로 햇살이 기어이 비집고 나와 다시 무더위에 뻘뻘 땀 흘리다가, 투두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피하려고 우산을 찾아 쓰면 살그머니 비가 그치고. 아무튼 여름 날씨 변덕이 그렇게 심할 수 없는 날이었다.
아침엔 늦잠 자는 아이들, 남편 몰래 바깥에 나와 산책을 했다. 여행 아침마다 조깅을 하겠다고 공언을 했지만 조깅은 무슨 조깅! 아침잠 많은 엄마는 아이들보다 더 늘어지게 잠을 자버렸지만 셋째 날은 조금 일찍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숙소에서 청계천을 따라 직진, 공구 거리? 에서 좌회전하다가 세운 상가에서 우회전하니 종묘가 나왔다. 기억을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아이들을 깨워 준비를 서둘렀다. 기대되는 하루였다.
셋째 날은 종묘와 창덕궁을 갔다. 앞서 쓴 것처럼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미리 작은 우산을 각자 하나씩 준비하고 숙소에서 당차게 걸어 나왔지만 5분도 안되어서 늘러붙은 껌처럼 바닥에 착 가라앉은 아이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쮸쮸바를 하나씩 물고 조금 더 걷다 보니 종묘가 나왔다.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 편 1권에 그토록 극찬했던 장소가 종묘였다.
평일이어서 자유관람이 안되었고, 사전 예약한 시간까지 기다리려니 후덥지근했다. 종묘 정문(입구) 앞 통행로는 여름날 그 햇빛을 모두 반사시키는 반짝이는 모랫빛이었고, 양 옆으로 우람한 나무들도 햇살까지 가려주진 못해서 소나무 아래서 1시간 정도를 기다렸더니 시작부터 많이 힘들었다.
드디어 11시, 종묘 정문이 열렸다. 꽁꽁 닫혔던 문이 열리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구쳐있는 소나무들이 마을 앞을 지켜주는 장승처럼 종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바깥의 살벌한 더위가 이곳에서는 멈춘 듯, 마치 짠 듯이 빗방울 후드득 떨어졌다. 관람로를 따라 나무가 비를 가려주는 우산처럼 우거져 있어 우산이 거추장스러 안 쓰고 돌아다녔다.
종묘 안은 인간(제사를 지내는 왕과 신하 등)과 신(역대 왕과 왕비 등)이 만나는 영적인 공간이라고 생각을 해서인지 서늘한 기운이 있었다. 웬만한 잡귀는 여기에서 뼈도 못 추스를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역대 왕과 왕비, 사후 추존된 왕들, 태조의 4대조까지 조선 왕조 500년간 모셔진 이곳이 영험한 기운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제례를 준비하기 위한 여러 건물을 휙휙 지나 종묘 관람의 메인은 역시 정전이었다. 유홍준 선생님은 가 겨울 첫눈이 살포시 쌓였을 때의 정전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지만 정전은 직선이 만들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가장 육중하고 담대하게 보여주는 곳이었다.
역사, 문화적 지식이 아예 없는 우리 아들 딸의 눈에도 100미터 달리기로 할 수 있을 법한 가로 109미터의 정전은 길이에서부터 압도감이 느껴졌다. 쭉 뻗은 직선의 군더더기 없는 월대는 역대 왕의 신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손색없었다. 누구도 여기는 감히 침범하고 싶은 생각이 안들테니. 만약 건들었다가는 정전 신실 신주 속에 들어있는 천하를 호령했던 왕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설명도 사실 귀에 잘 들어오진 않았다.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졌고, 아이들은 처음엔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자못 진지했었으나 사진 몇 장 찍고, 큰 건물 보니 이젠 시원한 곳을 가고 싶어 했다. 엄마 마음이야 역대 왕 이름 외우기에 더불어 종묘 제례악까지 한바탕 듣고 가고 싶지만 공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므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니 서순라길이 이어졌고, 그대로 쭉 따라 걷다 보니 창덕궁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창덕궁 궁궐 내부보다는 후원 관람을 미리 예약했다. 창덕궁의 인정전, 푸른 기와의 선정전, 낙선대도 분명 좋았을 테지만 여름 한낮에 돌아다니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일부러 후원 관람을 신청한 것이다. 그런데 종묘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오후 되더니 본격적으로 쏟아붓기 시작해서 후원 관람 시각인 3시가 되어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창덕궁 내부에 있던 약방(무더위 쉼터)에서 더 쉬면서 비 내리는 궁궐 구경도 좋지 않나? 싶다가도 비 오는 날 후원 관람도 하기 힘든 경험일 것 같아 무거운 엉덩이를 기어코 들어 약속 장소인 후원 입구에 갔다.
내가 가본 서울 어떤 관광지를 통틀어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곳이 창덕궁이라고 평소 생각했다. 아이들이 3살 5살일 때 처음 서울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라 더 그런 것 같다. 그때 아들 유모차에 싣고 딸은 이쁜 원피스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후원을 돌아다녔었다. 더웠는데도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해서 오르막 내리막을 천천히 걸었던 것 같다. 그 길을 이번에는 비에 운동화, 옷 할 것 없이 모두 축축해져선 걸었다.
투닥거리는 아이들 소리가 빗소리에 묻혔고, 해설사의 설명도 흩어졌지만 눈은 아름다운 초록의 정원을 쫓아다녔다. 숨바꼭질 하듯 나무 사이, 모퉁이 사이, 언덕 너머 숨겨진 정자들은 이름을 모두 외우긴 힘들었지만 보는 내내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 모든 바람과 비와 햇빛을 이기고 그곳에 자리 잡은 정원들은 사람이 만든 인공적인 건물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것 바위처럼 나무처럼 자리하고 있어 더욱 아름다웠다.
예쁘다! 멋지다! 세상에! 감탄사를 연발하였지만 빗소리에 묻혀 싸우고 있던 아이들의 소리가 귓머리에 닿자 이젠 가야 하나 싶어 발길을 아쉽게 되돌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는 잦아들었고 꿉꿉함이 배가 되어 어디든 쾌적한 곳으로 가야 했다. 이날 많이 걸었다 싶었는데, 종묘, 창덕궁까지 모두 도보로 이동하다 보니 진짜 많이 걸었었다. 저녁식사까지 모두 하고 숙소에 돌아오니 2만 보 넘게 걸음수가 찍힌 것을 보자 가슴 벅찬 감동으로 가려졌던 피로감이 밀려왔다.
마지막 여행지는 서대문 형무소였다. 교보문고에서 책도 보고 쉬다가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도중에 독립문도 보여서 반가웠다.
갈색담벼락 옆으로 길게 뻗은 길을 따라 입구로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찾아 북적거려 자칫 까먹을 수도 있지만 서대문 형무소는 감옥이다. 그것도 살고 싶어 외친 사람들, 살고 싶어 거리로 나온 사람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나라의 해방과 독립을 외치고,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보통의 사람들을 가둔 감옥이다.
전시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엄숙할 수밖에 없는 곳들이다. 실제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열사들이 수감되었던 좁디좁은 방들을 보면 자연히 입이 다물어진다.
창살 너머 보이는 좁은 방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긴 세월 고통 속에 살았는지 예상이 되니까 입을 열 수 없다. 길게 뻗은 통로 옆에 어른 서넛이 온전히 몸을 뻗기도 힘든 좁은 옥사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종묘에서 느낀 엄숙함 웅장함과는 달랐다. 진짜 본능적으로 위협과 공포스러운 공간이라 서둘러 나가고 싶었지만 하나하나 차분히 들여다보았다.
아들은 실제 감옥이었다는 말을 들으니 호기심이 생겼는지 여기저기 만져도 보고 질문도 했다. 특히 안쪽에서 초인종처럼 생긴 버튼을 누르니 바깥으로 막대가 삐져나와 이게 뭔가 싶었는데, 옥사 안에서 급한 일이 일어나면 누르는 버튼이라고 한다. 우편함처럼 생긴 네모난 작은 문도 있는데 그곳으로는 식사를 넣어주었다고 한다. 여러 옥사를 지나 사형장까지 나올 땐 그 뙤약볕에도 모골이 송연하게 오싹함까지 느꼈다. 여옥사를 지나쳐 다시 바깥으로 와서야 숨이 바로 쉬어졌다.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취조하고 고문하고 겁박한 이 장소를 굳이 왜 와야 했을까?
잊으면 안 되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하니까
요즘 입에 계속 맴도는 노래가 있다. 광복절 전야제 때 알리와 매드클라운이 같이 부른 '대한이 살았다'다.
광복절 전야제도 처음이었지만 그 노래도 처음이어서 노랫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무슨 말이지 싶었다. 노래가 절정으로 갈수록 알게 되었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도록 만세를 불렀던 독립운동가들을!
처음 노래를 들은 후 원곡을 다시 찾아 들어보니 한때 내가 참으로 좋아했던 박정현 가수의 노래였다. 실제로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서 수감되셨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아드님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형무소에서 불렀다며 들려주셨던 노랫말이 지금의 노래가 되었다고 한다.
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하느님께 기도할 때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서 불렀다던 노래가 가락은 잊혔지만 노랫말로 전해져 지금 2025 여름 한복판에 살아났다. 그 노래가 광복절 전야제에 울려 퍼져 이 나라 곳곳에 다시 스며들어 여름을 살게 한다.
서울 여행에서 마지막 장소가 서대문 형무소라니,
그곳에서 불렀던 노래가 되살아나 광복절에 우리 가족 모두 들을 수 있다니.
이 나라를 지금까지 존재하게 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다 몰라도 가슴을 덥히며 기억할 수 있는 뜨거운 여름이 감사했다.
감사함을 잊지 않기 위해 요즘 우리 아이들과 다시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고대 국가부터 외우듯 공부하면 힘들 것 같아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해서 영상도 보고 만화도 보면서 천천히 공부하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여름 우리 아이들 마음에도 대한이 살기를 바라며 잊지 않기 위해 나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