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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오후, 내가 본 것들.

by 다시

사철나무, 남천, 조팝나무, 은행나무, 칡, 갈대,

왜가리 한 마리, 참새떼.

남자아이들, 물수제비 뜨는 형제.

자전거 타고 돌아가는 아저씨들.

까만 강아지 뒤를 따르는 중년 부부.

머리에 닿을 것 같은 다리 구조물.

물속에 머리 박고 있는 오리 두 마리.

앞서가는 아버지 자전거 한대

뒤따라 자전거 타고 가는 아들.

어느새 높아진 하늘 길게 흐르는 구름.

단정하게 묶은 머리칼이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너.


도서관에서 식곤증에 꾸벅꾸벅 졸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근육통이 있다는 딸 말에 새로 생긴 산책로에 갔다.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고 벌써 늦은 오후로 가득한 산책로에 들어갔는데, 입이 시렸다.


출발 시간 오후 5시 6분.

천천히 아이스크림이 녹는 시간만큼 더디 걸었다.

아사삭 입속에서 녹는 아이스크림 덕분에 조용한 딸과 내딛는 발걸음에 집중하는 나 사이에 대화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우뚝 선 아파트 단지와 큰길 사이, 원래도 있었던 동네 시냇가였지만 폭이 넓어서 비가 오면 주변의 풀덤불을 휩쓸어버릴 만큼 무섭게 커지는 일이 많아 사람들이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뒤엉켜 있는 풀숲을 헤치면 예전에 놀던 동네 시냇물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았지만 그런 용기는 이젠 없었기에 흐르는 물만 봤다.

오리 떼가 둥실둥실 떠다니고, 가끔은 고라니도 성큼 뛰어다닐 만큼 산과 가까운 하천이라 분명 물고기도 많이 살 것 같았는데 이 동네에 산 10년 동안 굳이 가까이 간 적은 없이 먼발치서만 봤었다.


올해 봄부터 하천 정비 공사를 한다고 매일 큰 공사 차량이 드나들고, 시끄러웠는데 여름이 지나고 가보니 예쁜 산책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산책로가 시작되는 곳부터 직선으로 쭉 걸어가면 거제 굴지의 조선소가 한눈에 보일만큼 경치가 좋은 길이라 길을 발견한 이후 딸과 종종 가는 중이다.


지난번에 왔을 땐 온갖 잡풀과 칡덩굴이 얽혀서 산책로까지 넘실거렸는데 오늘 가보니 모두 말끔히 정리된 모습이라 유심히 보니 거무튀튀하게 말라있다. 제초제 덕분인 것 같다. 다 말라도 기어이 갈대랑 칡은 올라왔다.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바쁜 딸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데, 훅하고 물비린내가 났다.

가까이 대여섯 명의 남자아이들이 무릎까지 젖은 채로 산책로에서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다. 물속에서 한바탕 논 것이 분명했다. 젖은 양말을 벗어서 땅바닥에 철퍼덕 던져 놓고 젖은 바지를 둘둘 말고도 바닥 곳곳에 물이 흥건한 것을 보아 얼마 전까지 왁자지껄했을 것이다. 그 옆을 유유히 비켜 걷자니 한번 더 뒤돌아 보게 되었다.

까맣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이 어여뻤다.

아이들을 지나치자 가려진 풀숲 사이로 왠 큰 새 한 마리가 조용히 서 있었다.

어디를 보는지 고요한 오후처럼 가만있던 새는 물속에 발을 넣고 늦은 더위를 식히고 있는지, 원하는 먹잇감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시간을 들여 숨죽이고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왜가리 한 마리가 거기 있었다.

사람들의 공간에 새가 온 것인지.

원래 새들의 터전에 사람이 침범한 것인지.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다행한 일로 아무도 새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아 한참을 걸어간 이후 다시 돌아봤을 때도 새는 그곳에 있었다.


-엄마는 어렸을 때 이런 시냇물에서 여름마다 놀았어.

-진짜?

-응! 그냥 물속에 다리 담그고 첨벙거리고, 큰 돌로 둑을 쌓아서 놀기도 하고, 조그만 통발을 흐르는 물속에 넣어두면 조금 있다 물고기 몇 마리 잡기도 하고.

-재밌었어?

-재밌었지! 그냥 그렇게 놀았어. 동네 친구들, 언니 오빠 동생들하고. 너도 친구들하고 마음껏 놀아.


지금 딸에게 내가 놀았던 것처럼 놀라고 하면 깔끔쟁이 녀석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아들은 말하는 순간 물속으로 들어갈 것 같으니 당분간은 말하지 않아야겠다.


땀에 끈끈한 손이라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은행나무 밑에 노란 은행 열매가 툭툭 떨어지고 터져 있었다. 살금살금 피해 뛰듯이 걸으니 어느새 출발했던 곳이었다.

오후가 저녁이 되었다.

이렇게 살고 있으니.. 살아있으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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