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꽃이 자라고 있고, 나비가 날고 있는데 어머니가 죽었다. 나는 슬픈데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자연은 나의 슬픔에 관심이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브레히트는 일기를 적었다
우리 엄마는 5월 1일에 죽었다.
한창 봄이 무르익던 때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하늘은 맑았다.
……
엄마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엄마를 내 방식대로 사랑했다.
하지만 엄마는 자기 방식대로 사랑받기를 원했다.
마지막 두 줄은 타인의 삶이 내 삶의 은유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런 경험이 있지 않나. 상대방은 나를 사랑하는데 그것이 전혀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때, 나는 사랑을 하는데 상대방이 그걸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때. 그래서 내 사랑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순간. 너의 사랑도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순간. 그건 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대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방이 받고 싶은 방식대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주고 싶은 것을 주고 사랑했다 말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썼다. 평생을 걸쳐서 완성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마침내 썼다. 작가들은 1판 1쇄를 소중하게 간직한다. 어떤 작가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미안합니다. 1쇄 본이 얼마 남지 않아서 2쇄에 사인을 할게요."
어쨌든 1쇄는 그렇게 중요하고 마르크스는 인쇄소로 달려가 1쇄 중에서도 제일 처음에 나온 책을 받아서 곱게 포장을 해서 엄마에게 보냈다. 작가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첫 책을 누군가에게 보낸다면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그것을 받은 엄마에게로부터 마르크스는 답장을 받는다.
'나는 네가 돈에 대한 책을 쓰기보다 돈을 좀 벌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마르크스가 보낸 사랑은 사랑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시인들의 시나 글들을 읽다가 보면 내 삶에 대한 은유라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런 느낌의 순간을 시적인 순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감상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에는 거울에 비추어 본다, 가 있다. 문학작품에 나를 비추어서 나를 찾아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