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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오유 Apr 07. 2022

밀키트가 우리를 구원할 거야

집밥과 배달 그 사이, 밀키트와 함께한 일주일의 기록

코로나 확진과 동시에 온몸의 기력이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몇 주동안 잠도 못 자고 쉼 없이 달리다가 정말 오랜만에 휴일을 맞이한 날, 세수도 안 하고 머리도 안 감고 그저 침대 위에만 시체처럼 있고 싶은 그런 무기력함을 아시는지. 기세등등하게 그 위력을 뽐내는 바이러스에 짓눌린 나와 남편은 약 기운에 취해 자다가, 누워있다가,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약을 먹어야 하니 끼니는 잘 챙겨 먹어야겠는데 도저히 무언가를 만들어 먹을 기운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이 곧 행복이었던 나인데... 배달을 시키려 해도 입맛이 없으니 당최 뭘 시켜 먹어야 할지 아무런 메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우리 앞에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띵-동. 앞서 코로나 확진을 경험한 남편의 지인이 보내준 며칠 분량의 밀키트였다. 재직 중인 회사에 확진자가 급증하다 보니 인사팀에서도 확진된 직원들에 한 해 동거 가족과 함께 먹을 밀키트를 보내주었다. 우리의 사정을 잘 아는 가족들도 자발적으로 동참해주었다. '네, 그렇습니다... 음식 배달 시스템이 없었다면 저희는 분명 쫄쫄 굶고 있을 거예요...'라고 말하듯 현관문 앞엔 'B마트/ OO수산/ OO매운탕' 따위의 글자가 크게 새겨진 구원의 택배들이 쌓이고 치워졌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현관문 앞은 그 사람의 '상태 메시지'라고 했던가. 우리의 상태 메시지는 곧 '밀키트가 우리를 구원할 거야'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쌓이는 쓰레기도 만만치 않았다. 자가격리로 인해 집 밖에 나갈 수가 없어 안쪽 현관문 앞에는 엄청난 상자 박스가 쌓여만 갔다. 하지만 힘을 내기 위해, 아니 살기 위해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래도 굶지 않고 누군가의 손으로 만든 음식의 힘을 빌릴 수 있어서 참 다행인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전에는 밀키트와 그렇게 가깝지 못했다. 신혼 초에 호기심에 한 두 번 밀키트를 구입하기도 했지만 직접 재료를 사서 요리해먹는 게 훨씬 양도 많고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멀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리할 의지와 기운이 없는 이런 상황에서 밀키트는 정말 말 그대로 '구원의 손길'이었다. 박스를 열어 내용물이 든 봉지를 꺼내 냄비에 한 번에 붓고, 작은 비닐에 든 소스만 쪼로록 부어서 끓이면 끝. 우리는 그렇게 집에서 맵칼한 대구탕도 먹고, 뜨끈한 만두전골도 먹으며 조금씩 기운을 되찾아나갔다. 집밥과 배달음식 그 사이 어딘가의 밀키트가 있었기에, 독한 약 기운을 그나마 버텨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몸이 아프니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이 보고싶음은 그리움보다는 '미안함'에 가까웠다. 허리가 아파서 잠시 일을 쉬실 때도, 몸살감기로 끙끙 누워 계실 때도 가족들의 밥상을 차리는 일만큼은 거르지 않던 엄마의 지난날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희생이었는지 엄마 곁을 떠나보니 이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에게 건강하면서도 맛있는 밀키트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다고, 요리하기 힘들 때는 애쓰지 말고 우리 꼭 밀키트의 힘을 빌리자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이제부터 나와 엄마의 냉동실에는 언제나 비상용 밀키트가 자리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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