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편견에 균열을 내다
이 책의 저자인 김재련 변호사는 20년 동안 성폭력 피해자, 가정폭력, 성매매 피해자, 결혼이주여성, 아동학대 사건 변론을 1,000건 이상 맡아 왔다. 무료법률구조 활동도 하였으며 여성가족부 국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성폭력 피해자 지원정책에도 참여했다
'곁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상처 입은 사람을 보듬어 주고, 삶의 힘든 지점에 서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사람으로 인해 다시 힘을 얻는' 따뜻한 세상을 꿈꾼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책에 담긴 사례들이 모두 실재했기에 읽는 내내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책을 펼쳤던 카페, 기차 안, 게스트하우스 거실에서 나는 그날의 청량한 하늘과 대조되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시절, 동네 어른들을 떠올려 보면 짧은 치마를 입은 피해자가 성범죄를 유발했다는 인식이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로 미투 운동을 비롯해 페미니즘 관련 영상과 서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인지 지금은 그때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성범죄, 특히 피해 여성을 대하는 가해자 중심주의 시각과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시선이 만연하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누구에게 성폭행당했다'라는 말을 그대로 믿어주지 않는다. 가해자가 억울한 누명을 쓰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까닭이다. 때문에 자신이 성폭행당했다는 증거와 가해자가 자신을 성폭행했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목격자가 아무도 없는 둘 만 있는 공간에서 벌어진 성폭력은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대항했을 때 벌어질 2차 폭력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않아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면 피해자에게 더욱 불리한 상황이 된다. 현재 우리는 명백한 피해자임에도 가시적인 증거가 없으면 불리해지고, 어떤 경우엔 되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한 사회에 살고 있다.
저자는 집에 침입해서 흉기를 들고 협박하는 강도에게 돈을 주었다고 하여 아무도 그것을 강도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와 같은 시각으로 성폭력을 바라보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다.
강도, 피해 주민과 상사와 직원, 연예계 대표와 지망생의 공통점은 그들이 위력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쉽게 저항하기 어렵다.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강도와 맞서 싸우지 않고 그가 요구하는 것을 순순히 준 행위를 옳게 본다.
그러나 성범죄에 있어서는 피해자의 지나치게 순응적인 태도를 비난하거나 그들의 의도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성폭행당하는데 왜 도망치거나 소리 지르지 않았냐, 왜 빨리 신고하지 않았냐 등 '피해자다움'을 정의하고 강조한다. 사건 조사받는 중에 하나도 울지 않은 점을 의아해했다는 사례는 황당할 뿐이다. 피해자다움이란 없다. '내가 울지 않았다고 해서 슬픈 멜로가 코믹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56).
그리고 지난주에 올라온 참담한 뉴스이다. 10분 넘게 어깨를 주무를 동안 왜 피하지 않았는지, 왜 저항하지 않았는지 '판사의 관점에서' 납득되지 않으면 피해자의 주장은 신빙성을 잃는 세상이다. 저자가 "성과 관련된 사건을 상담하거나 수사하거나 재판하는 사람은 특정 단어, 특정 장면을 근거로 판단하지 말고,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된 '앞뒤 맥락'을 꼼꼼히 살펴보라"(36)고 성인지 감수성을 힘주어 말한 대목이 떠오른다.
법이 존재하는 이유를 보여준 사례가 있다. 친부에게 수년간 성폭행당한 피해자가 용기 내 아버지를 신고했는데, 구속 과정에서 자신을 비롯해 너무나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피해자가 아버지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고소 취하서를 작성한 것이다. 변호사인 저자는 그것을 법원에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법원은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 뉘우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피해자는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다른 가족들로부터 받은 심리적 압박에 의해 고소 취하서를 제출하게 된 것으로 보이므로' 피해자의 고소 취하서를 고려하지 않았다. 법원이 모든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판단한 결과, 피해자는 보호받고 가해자는 그에 맞는 벌을 받게 된 사례이다.
피해자임에도 자신이 성폭행당한 사실을 알렸을 때 상처받을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자신에게 씔 편견을 걱정하여 신고를 주저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마음보다 앞으로 닥칠 상황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면, 그것은 법이 피해자를 제대로 안심시켜주지 못한다는 소리다.
내가 폭력을 당했을 때, 2차 폭력을 향한 두려움보다 법이 나를 보호해 줄 거라는 기대가 압도적으로 큰 세상을 꿈꾼다.
그러한 세상을 위해선 판사, 변호인, 수사관 개인의 성인지 감수성 정도에 따라 내려지는 판결이 아닌, 애초에 법이 피해자 편에 서 있으면 쉬울 일이다.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을 경우‘ 저항하지 않아도 강간죄 성립에 영향이 없도록 규정한 독일 형법처럼, 우리 법이 피해자의 편에 있음을 증명하는 게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피해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살아내야 한다(220)고 애절하게 말한다. 제발 이 사건으로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치지 않았으면 한다고.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나는 피해자를 향한 공감 어린 표현이라는 이유로 이 관용적인 말을 두루 사용하곤 했었다. 당시 '상처'에 방점을 두어 '씻을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그것은 주홍 글씨처럼 ‘피해자’라고 낙인을 찍는 것과 같았다. 지나친 공감이 오히려 폭력이 되었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 있어, 피해자들이 회복하여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선 나의 언어와 행동을 돌아보는 게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피해자』는 저자가 피해자들에게 보내는 위로이자수사관과 검사, 판사에게 보내는 당부의 말이자, 견고한 편견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저자의 의지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에게서 얻은 상처는 사람의 힘으로 다시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다정한 세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저자와 뜻을 함께 하고픈 책이다.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