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 『세상 모든 바다』 를 읽고
'세상 모든 바다'라는 제목을 지나칠 사람이 있을까.
제목만 보았을 때 왠지 아련하고 뭉클한 추억을 담은 윤슬을 예상했는데, 읽어보니 방파제 언저리에서 맞는 뜨뜻미지근한 해풍이었다.
당신은 '세상 모든 바다'의 팬입니까. 아무나에게 괜히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해도 될까. 질문을 하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나'의 이름은 하쿠다. 하쿠는 재일 한국인이자 한국계 일본인이다. 그는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오타쿠들을 보고 그 '키모이'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백영록의 첫 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고 느낀 이유도 그의 오타쿠 같은 패션 때문이다.
하쿠는 스스로를 세모나(세상 모든 바다) '안방 덕후'라고 하다가도, 굿즈를 만지작 거리는 자신에게 영록이 살 거냐고 묻자 '내가 그렇게 열렬한 덕후는 아니라고' 생각을 바꾼다. 그런 자신과 영록의 가장 큰 대조는 영록은 '아이 라이크 디스 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소식을 주고 받고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은 지 오래다.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가 확장되었다고 하지만, 표현을 재고하게 만드는 잣대도 등장했다. 이 게시글을 올리면 사람들은 날 어떻게 볼까, 아이돌 덕질한다고 하면 내 이미지가 바뀌진 않을까···.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던 하쿠는 남들 눈에 자신이 '키모이한 오타쿠들과 비슷한 존재'로 비춰질까 걱정하며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는 걸 감추고' 싶어한다. 그런 자신에게 세모바는 환경,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거리낌 없이 좋아해도 되는 그룹'이었으며 그들을 '아이돌로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좋아하는 것에도 등급이 있다는 듯.
하쿠가 세모바 콘서트 굿즈 숍에서 영록을 처음 만난 그 날, 트위터에서 봤기를 세모나의 게릴라 공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조차 진실이라 믿지 않는 소문을 영록에게 전했다. 비가 많이 왔고, 하쿠는 집에 왔다.
잠실에 머물렀던 영록은 세모나로 가장한 반전反戰 단체의 가짜 총소리 퍼포먼스에 도망치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죽은 아홉 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하쿠는 영록이 살던 해진이라는 마을로 갔다. 그곳에는 원자력 발전소 반대 서명 운동을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성명, 생년월일, 연락처를 적는 양식을 내밀었다. #Save_My_Bada 운동이 익숙한 시대에 서명운동은 좀처럼 보기 힘든 옛 방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진실로 어떤 움직임을 지지한다면 익명으로 이루어진 공간의 해시태그보단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서명하는 쪽에 더 힘이 실리지 않는가?
이러한 자문은 내 이름이 어떠한 효력이 있을까, 이 아주머니는 주민들을 얼마나 대표할까, 단지 보상금의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고 원전을 지어도 될까, 개인정보가 악용될 가능성은 없을까,라는 의심 섞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하쿠는 "죄송합니다" 한마디를 남기고 버스에 올라탄다.
영록의 사고를 계기로 진짜 바다에 닿은 하쿠는 '근시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생각한다.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오타쿠들의 외침을 상기하며,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타인의 시선을 등한시하고 가까이 있는 것을 숨김 없이 좋아하는, 지금 시대에 가장 투명한 '근시'의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지 않나, 하는 생각.
만약 하쿠가 영록이라는 사람을 몰랐다면 그래도 이만큼의 죄책감을 가졌을까.
트위터에서 본 허위 사실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나만 알고 있었다면 사고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걸까.
'지구촌'이라는 말은 모두가 지구라는 마을의 이웃이라는 소린데, 그 단어가 무색하게 지금 세상은 타인의 비극에 굉장히 무감각하다. 일면식 있는 지인, 가까운 친구나 가족처럼 익숙한 대상과 '그 외' 사람들의 비극엔 어떠한 간극이 존재한다.
올 하반기가 시작되는 7월 1일, 시청역 인근에서 사고가 났다. 급발진 차량으로 의심되는 차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하여 총 9명이 숨졌다. 인터넷에는 '사망자 전부 남성'임을 강조하는 확증 편향이 자리하는 커뮤니티에서 볼 법한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고령 운전자 사고 문제를 넘어 노인 혐오로, 사망자 추모 공간이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문구로 번지며 곳곳에서 혐오가 번지고 있다.
친구는 평소에 시청-종로 일대를 자주 가는 나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걱정했다. '다행히' 나는 그때 집에 있었고 친구는 '안도했다'. 자기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게 이기적임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사고를 접할 때 지인이 그곳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들 때면 불편하다. 왜 타인의 비극을 내 일처럼 느끼기란 어려울까. 소통의 밀접과 무관하게 어째 죽음은 더 무감각해지고 멀어진 기분이다.
무엇을 했어야 할 의무는 내게 없었다. 하지만 할 수도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기분.
바위에 부딪친 파도처럼 튀어오르는 혐오 앞에서 우리는 연결이 반가운 세상에 살고 있나, 두려운 세상에 살고 있나.
들여다보면 그 사람'만'의 죽음은 없다. 떠오르는 모든 죽음은 타인과 연관된다. 죽음의 원인과 결과를 비롯한 모든 순간에 말이다. 사회 속 죽음을 무관하게 여기지 않고 각자 무언가를 짊어져야 하는 이유다.
『세상 모든 바다』는 시간순으로 전개되지 않고 영록의 사고를 계기로 하쿠가 회고하고 깨달은 것들을 들려주는 1인칭 시점의 글이다.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읽고 나서 하쿠의 일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 일기는 영록의 죽음에 대해 하쿠가 짊어지기로 한 것일 테다. 영록과 한국어로 나눌 수도 있었던 대화들에 대해, 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말에 대해.
커버 사진 출처 : @david.pog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