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무 이름이 뭐더라?”
공원 야생화 조성 구역을 돌아보다 하얀색 꽃(흰색 꽃으로 보이는 부분이 사실 꽃받침이었다) 잔뜩 달고 있는 나무의 이름을 친구에게 물었다. 알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였다.
건물 앞 화단을 직접 가꾼다는 친구는 꽃이름에 대해 정말 많이 안다. 물어보는 대로 척척이다.
“서양 산딸나무!”
요즘은 과거에 알았던 것들의 이름이 가물가물한 경우가 태반이다.
지금은 다시 교단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내가 먼저 손사래를 칠 것 같다. 평소 일상적으로 쓰던 단어도 생각나지 않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이화에 월백하고 그다음 뭐지???”
친구가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시조를 나에게 물었다. 흰색 꽃을 보니 저절로 '이화에 월백하고'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은한이 삼경인데’와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는 기억나는데 중장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우물거리며 생각나는 부분만 말해도 다음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봄이면 복숭아나 배꽃이 저절로 떠오르는 건 인지상정. 국정교과서 세대인 우리들은 모두 이 시조를 거의 암기해야 했었다.
국문과 출신의 나보다 더 감성적인 친구의 기억력에 감탄하고 마는 딱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는데. 나도 일부분만 기억난다고 말해도 아무 일 없었을 텐데. 그놈의 자존심이!!!
“작가 이름이??? 이조년~“
나도 모르게 이런 소리를 했다.
“아닌데?”
나는 작가 이름을 동의하지 않았다. 고려시대 이색이라고 희미하게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런 실수는 내 전직이 중학교 국어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아마 국문학 전공도 아닌 친구가 나보다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오만한 마음 탓?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 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이조년>
집에 돌아와 전문을 찾아 다시 읽었다. 무엇보다 시조의 주인인 이조년을 수십 년 동안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친구에게 정말 미안했다.
나는 배꽃과 복숭아꽃을 정말 좋아한다. 아니~, 한국 사람 중에 배꽃과 복숭아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부모님 살아 계실 때는 배꽃 필 무렵이면 달밤에 일부러 배 과수원 주변을 산책하러 갔었다.
경기도 화성 구포리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나는 배와 복숭아 과수원 주변에서 자란 거나 마찬가지다. 특히 구포리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배 과수원 단지로 개발된 지역이었기에 봄이 오면 배꽃의 향연이 드넓게 펼쳐졌다. 친숙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조년의 <다정가>도 봄이면 나도 모르게 떠올리는 시였다고나 할까? 오만이라는 병은 어쩌면 여기서 출발했을 수도. 왜인지 그런 기억을 가져야만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친구는 주말까지 일을 하며 손주까지 돌본다. 겨우 주일 오후나 짬을 내 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친구가 봄바람 좀 쏘이며 만개한 꽃들을 보겠다며 굳이 공원까지 걸음 했는데.
기억력의 왜곡에 얄팍한 오만함까지 곁들여 부족한 인성까지 내보였구나 하는 반성이 후회처럼 남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