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름이 왔다. 박물관 뒤쪽 계단은 지난주부터 통행이 해제되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아롱이를 불렀다. 아롱이가 계단 꼭대기에서 나온다. 반갑다. 아롱이를 데리고 사랑이를 찾아 전망대를 향해 올라갔다. 사랑이가 바람처럼 달려온다. 평일이라 사람들 통행이 없다.
"애기들, 밥 먹으러 가자~!" 제 엄마 아롱이와 코비비기를 하던 사랑이가 소수레를 향해 앞서간다. 지난여름 그곳에서 자주 밥을 먹였었다. 날이 쌀쌀해지며 소수레에서 밥을 먹이지 못하게 되자 아롱이만 박물관 주차장 주변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사랑이는 레스토랑이 있는 그 주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홀로 지냈다. 여름이 되니 아롱이가 다시 박물관 뒤 전망대 주변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롱이는 엄마 고양이답게 딸인 사랑이를 끈질기게 독립시키려 애썼다. 아롱이를 찾아 사랑이 옆으로 데려다 놔도 어느새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추운 겨울 함께 지내면 추위라도 덜할 텐데.
사랑이는 겁이 많다. 어지간히 배가 고프지 않으면 주차장 주변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다롱이에게 물어뜯긴 트라우마 때문이 아닐까?
박물관 하늘공원 전망대는 지대가 높아 사방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려다보이는 나무의 정수리에 햇살이 반짝거린다. 나뭇잎들이 바람결을 따라 서로의 손을 비비는 모습이 어여쁘다.
급식용 검정 봉투를 들고 박물관 뒤 계단을 오르기 전부터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열흘 넘게 비가 내리지 않은 탓인지 습기가 없는 데도 땀이 나는 걸 보면 여름이 확실히 온 모양이다. 멀리 남한산의 완만한 능선 어디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기저기 급식을 마치고 땀범벅이 되어 잠시 앉아 쉬어가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얼마 전 봄 내내 쑥쑥 자란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고 잔디를 휑할 정도로 깎았다. 잔디에서조차 마른 먼지가 올라오는 느낌이 다 들었다.
심각한 곳은 조릿대의 절반을 뭉텅 잘라낸 귀요미 자리다. 조릿대를 잘라낸 곳에는 있는 지도 몰랐던 미술관 송풍기가 드러났다.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라 조릿대를 그 자리에 조성한 듯한데...
귀요미 급식소는 갈 때마다 민달팽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굵은소금을 뿌려둬도 효과는 이틀이 안 가는 것 같다. 사료통과 물그릇에 붙은 달팽이를 열댓 마리는 털어내야 한다. 잘라낸 조릿대 틈에 웅크리고 있던 귀요미가 나올 때마다 애잔해 보인다. 차라리 아롱이 사랑이 모녀 근처 하늘공원 쪽에 있어면 좋을 텐데.
사랑이는 자기를 부르면 반드시 대답한다. 그 맑은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 지 모른다. 며칠 전에는 영역을 침범한 치즈 고양이를 피해 전망대 근처까지 도망가 있었다. 철쭉과 억새가 조성된 구역에서 나오지 못하고 울기만 하길래 어디 다친 건 아닌가 걱정이 다 되었다.
그 못된 고양이 다롱이에게 물어 뜯겨 예쁜 귀가 너덜거린다. 젖소 무늬에 황금빛 도는 붉은 눈동자를 가져 정말 예쁜 녀석인데.
아롱이는 관대한 편이지만 새끼들을 괴롭히는 건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다롱이는 아롱이를 무서워한다. 아롱이가 나를 따라 귀요미 자리에 오면 흠칫 놀라 도망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자기 새끼 건드리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는 용감한 엄마가 바로 아롱이다.
소수레에 앉아 아롱이와 사랑이에게 밥을 주고 멀리 남한산을 바라보았다. 여름이 한창이다. 즐비한 아파트와 집 들 너머로 바람이 건너오는 게 나뭇잎들의 흔들림으로 알 수 있다. 붉은빛이 도는 높은 담장 너머로 새들의 합창이 들린다. 바람에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춤을 추는 나뭇잎들을 내려다보며 잠시 더위를 식혔다. 작년처럼 올해도 그곳에서 아롱이와 사랑이가 아무 두려움 없이 여름을 보낼 수 있기를~
밥을 정신없이 해치우는 둘을 나도 모르게 애잔한 마음으로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찍은 사진을 확인하다 집을 나서기 전 본 까미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근래 까미는 현관 앞에 나가 자주 야옹거린다. 문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명백한 의사 표현이다.
문을 열어주면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올라 옥상 쪽으로 달려간다. 집을 나가 보고 싶기는 한데 겁은 나는지 더 멀리 가지는 않고 꾸물거린다. 그렇다고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지붕으로 올라갈까봐 얼른 잡아 집으로 데려온다.
가끔 자유롭지만 위험한 모습이 보이는 공원생활과 안전하지만 갇혀 지내야 하는 입양 중 어느 것이 옳은지 나는 아직도 판단이 어렵다. 겨울은 확실히 집이 좋지만 다른 계절은 공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입양한 고양이를 돌보는 사람들이 정원이 있는 넓고 한적한 집을 꿈꾸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인간이나 고양이나 삶이 고단한 건 다 마찬가지. 날이 더워지면서 슬슬 내 팔을 베고 자는 걸 피하는 까미가 그래도 한없이 귀여운 건 아마 이런 마음 때문이겠지?
얼마 전 작은 아들이 집에 왔을 때 남편이 농담처럼
"네 고양이(나리) 엄청 싸가지 없다며?" 라고 물었다.
작은 아들의 대답은 이랬다.
"싸가지는 없어도 애교도 잘 부려~"
남편과 나는 한참을 웃었다. 아롱이 딸 나리와 아옹다옹하면서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어서다.
하늘공원을 내려와 주차장 근처로 와 보니 아롱이 딸 고등어가 냥냥거리며 달려온다. 요즘 들어 고등어의 애교도 장난 아니다. 바닥을 뒹굴며 나를 바라보는 귀여운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짠하다.
지난해 여름 어디론가 사라진 고등어 아들 고니 때문이다. 지금은 고니의 기억도 까마득하다. 하긴 지난 6년 동안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게 된 공원 냥이들이 어디 한 두 마리인가? 아롱이와 사랑이 고등어 그리고 까미 외삼촌 귀요미 모두 다시 온 이 여름을 건강하게 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