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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동 시절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1

by 권영순

뱅골 시절은 우리들의 요람기였다. 또한 아버지의 진두지휘 아래 미래에 대비한 기본 역량을 쌓은 시기이기도 했다. 뱅골에서는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가 엄마나 우리들의 의견과 충돌할 일이 없었다. 어떤 문제라도 아버지의 뜻에 맞게 조종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권위적인 아버지가 대세였다.


그러나 제기시장에 터를 잡고 장사를 시작하시면서 부모님은 너무 바빠지셨다. 우리들의 생활을 지휘 감독하고 미래에 대해 서로 의견을 조율할 시간조차 내기 어려웠다. 엄마는 새벽 5시면 청량리나 경동시장으로 멀리는 용산 시장으로 향하셨다. 장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시간은 밤 10시를 훌쩍 넘기는 게 일상이었다. 일 년 내내 쉬는 날을 찾기 힘들었다. 쉬는 날이라야 추석과 설날 당일이었다. 그 이외에는 여름휴가로 하루 쉬는 날이 있었던 듯하다. 온 가족이 양수리와 덕소 근처 강변에 여름휴가로 물놀이를 간 기억이 유일하지만 말이다. 대신 우리끼리 지금의 뚝섬으로 놀러 갔다. 그 당시는 한강에서도 수영이 가능했다.


부모님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 바쁘셨던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물론 공부도 했다. 우리들은 모두 중고교 시절 성적이 상위권이었다. 적어도 학업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막내와 셋째 그리고 나까지 셋이 사거리를 떠나 서울로 오기 이전부터 오빠들은 학교를 다녀오면 부모님 돕기에 나서야 했다.


당시 주부들은 매일 오후면 시장에 와서 하루 찬거리를 마련했다. 집집마다 냉장고가 없던 시기여서 그건 주부들의 일과였다. 오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면 배달해야 할 야채 바구니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배달을 돕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내 남자 형제들은 모두 어릴 때부터 자전거 타기를 배웠다. 그래야 부모님의 일손을 덜어드리는 배달을 도울 수 있어서였다.


남자 형제들이 자전거 배달을 도운 것처럼 나에게도 일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딸이 하나였다. 자매가 없었던 내게 가사를 돕는 건 숙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집에도 가사도우미가 상주할 때가 많았다. 식모라고 불리던 분들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가사도우미를 구해놓아도 소용없는 때가 많았다. 우리는 워낙 대식구였다. 조부모님 두 분에 학교를 다니던 애들이 다섯이니 도시락 싸기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과 배달하는 분의 식사도 마련해 직접 가져다 드려야 했다.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때 밥을 하기도 했던 시절이라 그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일부는 연탄을 이용했다. 하지만 아직 가스를 쓰지 않던 때라 가사 일은 장난 아니게 많았다. 당연히 가사도우미들이 잘 붙어 있지 않고 툭하면 나가버렸다. 열 식구 이상의 삼시 세 끼와 각종 가사를 책임져야 하는 일이니 이해는 된다.


한창 자라던 우리들의 먹성은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삼시세끼 우리들의 엄청난 먹거리를 엄마가 어떻게 다 대셨을까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쌀도 가마니로 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는데. 엄마도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과일을 사도 우리 집은 낱개로 살 수 없었다. 그걸 누구 코에 붙이냐는 말이 우리 집에서는 일상이었다. 그만큼 음식의 질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 필요했다. 박스로 산 사과가 하루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비일비재였다. 어쩌다 집에서 부침개나 떡을 했더라도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고물이나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흔적을 치워버리기라도 했으면 화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

부엌 앞 쪽마루에 늘어져 있는 부침개나 떡의 흔적들을 치우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해 보라. 여자들이 말하는 남자들의 무심함이 그런 일에서 여지없이 발휘되었다고나 할까?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설이 되면 우리 집은 만두를 직접 만든다. 식구가 많아 파는 만두를 사다 먹을 수도 없다. 제법 큰 양은 대야에 김치 돼지고기 두부 등을 넣은 만두 속을 잔뜩 만들어 놓고 온 가족이 안방에 모여 앉아 일사불란하게 만두를 빚었다. 물론 각자 역할이 있었다. 반죽된 밀가루를 둥글게 잘라 작은 방망이로 밀어 만두피를 만드는 역할. 속을 채워 만두를 빚는 역할 등. 만두를 빚는 사이에도 부엌에서는 쉴 새 없이 만두를 쪄야 했다. 만두는 만들어서 바로 찜 솥에 쪄 보관해야 한다. 문제는 솥에서 찌기가 무섭게 식구들이 모두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셋째는 쪄 낸 만두를 계속 꺼내러 다니는 내게 솥 째로 들고 들어오지 뭐 하러 왔다 갔다 하느냐고 능청맞게 훈수를 둘 정도였다. 음식이 존재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마법이 우리 집에서는 거의 일상이었다.


한창 성장기인 오남매가 자라던 제기동에서는 먹거리 비축이라는 단어가 별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게 아무리 맛없는 음식이라도 남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엄청난 식량이 들었다. 한 겨울 김장 단지와 연탄 정도나 쌓아놓고 살았을까? 엄마가 상주하는 가사도우미를 힘들게 구해와도 오래 못 가는 이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기동에서 우리 형제들의 수장은 큰오빠였다. 지금 돌아보면 가족 내의 세대교체가 빨리 이루어진 것 같기는 하다. 조부모님은 너무 나이가 드셨다. 경제력도 없어지시면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신 거나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너무 바쁘셨다. 틈을 내 집을 들여다 보시기에는 장사를 하시던 제기 시장과 거리가 멀었다. 우리들이 집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거의 관리 감독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부모님 돕기는 강제적인 건 아니었다. 부모님 두 분의 고생을 늘 목격한 터라 도우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으셔도 자발적으로 그 일은 계속되었다. 거의 당연한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생각에 우리 오 남매는 누구 하나 이기적이지 못했다.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형제끼리 부모님 돕기에 네가 한 일이 적다고 불평하거나 다투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그냥 모든 게 순리대로 돌아간 듯하다. 어려움은 나누면 된다. 제기동에서 우리는 그게 당연했다. 그런 어려움의 극복을 모두 나서서 자발적으로 해 왔으니 지금의 우애도 가능한 게 아닐까?


부모님을 도와야 하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면서 제일 행복했던 건 뭘까?


첫째는 만화책 보기였다. 우리 형편에 과외나 학원은 언감생심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다음 집안일 돕기 이외에는 시간 여유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시간을 채운 것 중 하나가 만화 보기였다. 당시는 만화책 빌리기가 쉬웠다. 만화 가게를 각자 따로 다니는 것보다 집으로 빌려오면 훨씬 저렴했다. 다섯 명이 볼 수 있으니 당연했다. 아무리 가격이 저렴해도 비용은 필요했다. 대놓고 만화책을 빌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우리들은 돈을 음성적(?)으로 만들었다. 사실 거의 큰오빠가 비용을 댄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부 갹출도 한 것 같은데 비용 조달 비율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빌려오는 심부름은 막내가 거의 도맡았다.


겨울이면 우리는 만화를 거의 산더미처럼 빌려왔다. 모두 내 방에 모여 앉아 만화를 쌓아놓고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부모님이 돌아오시는 대문 소리가 들리면 다들 마루로 몰려 나가 공부하다 나온 것처럼 인사를 하는 센스도 있었다. 만화는 내 방바닥에 깔린 요 밑에 모두 숨겨두고서였다. 만화 보기를 들켜 부모님께 심한 꾸중을 들은 기억은 없다. 아마 철저한 우리 나름의 안전장치가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만화 보기를 끝내는 시간은 부모님 귀가에 맞춰졌다. 밀린 숙제나 공부는 그때부터였다. 그 시간 이외에도 나는 내 취향에 맞는 만화를 보기 위해 단골 만화 가게를 만들고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 새로 나오는 만화를 먼저 보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거의 만화책에 정신을 빼고 살았다는 게 맞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나의 만화책에 대한 사랑은 그 역사가 매우 긴 편이다. 지금도 가끔 만화를 빌려 보거나 인터넷으로 웹툰 보는 걸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서울시 교육연구원에서 논술활동을 할 때 만화에 대한 강의안을 자발적으로 맡아 쓰기도 했으니 말해 무엇하랴? 다행히 60년 된 도서관이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만화 대신 책을 마음껏 볼 기회가 생겼다. 도서대여점이 없던 시절이라 학교 앞 서점에서 책값의 일부만 내고 신간 서적도 빌려다 보면서 소설의 세계에도 입문했다.


우리 오 남매의 만화 사랑은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여기서 포인트는 ‘도움’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중학교에 입학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문학 서적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들을 읽다 보니 익숙한 스토리들이 많았다. 돌이켜 보면 모두 만화에서 본 것들이었다. 당시는 만화가로 활동하던 분들도 적었던 시절이다. 당연히 스토리를 구하기 힘들면 유명 소설 등을 골격으로 하여 완전 번안은 아니지만 재창작 수준의 만화를 그렸던 것이다.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였다. 번안이 아니라도 비슷한 내용을 만화로 그린 작품은 쉬운 책 읽기에 해당된다. 형제들 누구도 만화 읽기를 막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덕분에 우리 모두는 만화를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었다. 매번 빌려오는 만화의 양도 만만치 않았다. 두 팔로 들기도 힘들 만큼 잔뜩 빌려다 읽고 다음 날 반납해야 하는 터라 저절로 속독 훈련이 되었다.


만화를 많이 읽다 보니 나중에는 다섯이 읽는 속도가 거의 비슷해졌다. 누군가 천천히 읽으면 거기는 순환이 막혀 눈총을 받게 마련이었다. 그림과 스토리를 한 번에 이해하는 그 작업은 우리들의 뇌 순환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우리 모두에게 읽기에 대한 놀라운 순발력을 저절로 기르도록 도운 것이다. 뇌의 정보 처리 능력치를 엄청나게 높였다고나 할까?


의외로 만화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은 흔하다.

만화를 백해무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종종 조언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과 말싸움도 무릎 쓴다. 내가 그 본보기기에 힘주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정보가 넘쳐나다 못해 밀려드는 시대에 빠른 독해력은 무엇보다 든든한 스펙이다. 만화든 뭐든 책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라면 보는 걸 말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정 읽는 내용이 쓰레기들처럼 보여 인생에 도움이 안 될 거라고 걱정이 되면 방법을 찾으라고. 서로 조율해서 건전한 도서 비율을 일정한 양 정도 읽는 것으로 타협을 하라고. 적어도 책을 가지고 뒹구는 아이라면 커갈수록 학습이던 일이던 그 능력 향상은 비관적이지 않다고.


나도 만화의 해악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걸 안다. 아직도 난 포도같이 씨앗이 있는 과일은 씨를 삼킬까 겁을 낸다. 6학년 때인가 본 만화 때문이다. 만화 주인공이 포도 씨앗을 뱉어내지 않고 계속 먹는다. 그 씨앗이 몸에서 발아하더니 나중에는 주인공이 포도나무로 변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이 나무로 변하는 장면을 너무 리얼하게 그렸다고나 할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니 말이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벗어나기 힘든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만들 만큼 그 만화가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건 인정한다. 과학적인 정보를 가지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려 해도 한 번 각인된 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양서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만화에 대한 사랑을 멈추기 싫다.


만화로 소설보다 먼저 읽었던 <보물섬> <80일간의 세계일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빨강머리 앤> <수호지> <몬테크리스토 백작> 그리고 칠칠이가 주인공인 명랑 만화들. 이름도 다 기억나지 않는 그것들은 나의 삶을 관통하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행히 그 시절은 아직 성인물이 지금처럼 마구 돌아다니지 않았다. 폭력이 난무하는 통속적인 만화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일부였다. 만화를 수없이 읽고 자란 우리들 누구도 가정이나 사회에서 반사회적인 행동을 소소하게라도 저지른 적이 없다. 거꾸로 만화를 보고 자라지 않았다고 다 올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판단의 추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아붙일 일은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따뜻한 아랫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만화책 읽기에 열중하던 풍경은 분명 제기동에서 살던 시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1에 부족함 없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금오도 가는 배.jpg 작은 오빠는 홀로 하는 여행 중 지금도 이런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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