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모 Dec 30. 2022

아빠는 왜 필리핀 까지 와서 엄마를 찾을까?

시켜줘, 정여사 명예 소방관

우리 가족은 매년 최소 한번 이상 다 같이 여행을 떠난다. 매년 여행을 가더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내 조급함 때문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행러버 우리 아빠 때문이다.


아빠는 놀러 가기 한 달 전부터 아침마다 콧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평생 안 풀릴 듯 삐져있다가도 여행 가자는 말 한 마디면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한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하던 돈을 모아 아빠와 함께 단 둘이 필리핀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사정상 엄마가 참석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엄마는 자기와는 둘이서 홍콩을 다녀와봤으니 이번엔 아빠랑 함께 떠나보라고 했었다.


휴양, 바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중시하는 아빠에게 필리핀은 괜찮은 선택지일 것 같아 티켓을 끊고 자유여행으로 즐길 수 있는 패키지를 몇 가지 추가하였다.


호텔 내부에 있는 카지노도 구경하고, 호핑투어를 떠나 스노클링도 체험해 보고, 필리핀 시내를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들도 양껏 먹었다.


한 번은 아빠가 투어를 다녀온 차량에 여권과 지갑이 든 가방을 두고 내린 적이 있어, 혼자 다급하게 택시를 타고 차량을 역으로 쫓아가는 추격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가방을 흔들며 돌아오는 내 모습에 아빠는 후광이 났었다고 했었다.


이렇게 잊지 못할 추억들을 잔뜩 만들고 왔지만 그중 내 인상에 가장 깊게 남았던 건 특정 사건이 아닌 은은하게 배어있는 엄마를 생각하는 아빠의 마음들이었다.


엄마는 친구들과 함께 유럽을 떠난 적이 있는데 엄마의 친구들은 남편과 함께 안 오니 속이 편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공감이 잘 안 됐다고 나에게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아빠는 음식을 먹으면 흘리기 바쁜 엄마를 위해 항상 물티슈와 휴지를 챙겨 다녀 닦아주었고, 소화력이 약하고 물을 많이 마시는 엄마를 위한 소화약과 새로운 물병도 항상 준비 돼 있었다.


조금이라도 엄마에게 불편한 부분이 생기면 해결할 준비가 돼 있는 엄마의 전용 명예 소방관이었다.


필리핀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아빠는 "엄마가 먹었으면 참 좋아했을 건데", "이 음식은 너희 엄마가 잘하는 건데", "엄마도 이 공간에 왔으면 좋아했을 텐데, 다음엔 엄마랑도 꼭 같이 오자"라고 하는 모습들을 보며 아빠의 매 순간에는 엄마가 참 많이 묻어 있구나 싶었다.


작가의 이전글 재벌집 막내아들 보단 엄마 아들로 태어날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