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반가워요, 5학년 3학년 담임을 맡은 이경애입니다. 선생님은 광주에서 왔어요."
구수한 사투리로 말씀하셨었지만, 그때 나에게 사투리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모두가 사투리를 쓰는 세상이었으니. 선생님은 큰 치아와 큰 입을 가진 우악스러운 아줌마 같은 얼굴이었지만, 세련되게 투피스를 입고 계셨고 수줍게 웃으셨다.
내가 5학년이던 90년도 여수에는 자가용이 있는 집이 드물었기에 광주는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야만 갈 수 있는 먼 곳이었다. 요즘에야 조금 알려져 여수에 관광객이 찾는다지만, 당시에는 남도 끝 기차종점으로 인적 드문 곳이었다. 그런 여수에 광주에서 오신 선생님이라니, 선생님의 소개 만으로도 한껏 기대가 되었다. 광주는 딱 한번 어린이날 대공원에 놀러 가기 위해 다녀왔을 뿐인 촌뜨기인 나에게는 서울 바로 밑에 있는 도시처럼 크게 여겨졌다.
"선생님 이번주에 여수로 이사 올 거예요. 그러면 좀 더 많이 여러분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선생님은 주 중에만 머무르시고 주말에는 광주로 돌아가셨지만 작은 집을 하나 구하셔서 주중에 아들을 데리고 지내셨다. 선생님이 이사하시는 날 반 친구 여럿이 이사하는 것을 도왔었다. 큰 가전제품이나 가구 하나 없는 이사였고, 포장이사라는 것도 없던 시기엿기에 여러 명이서 짐을 날라야 했다. 단출한 짐들을 작은 손들이 하나씩 나르다 보니 금세 끝났었다. 나도 선생님과 같은 아파트였기에 집 안 구석구석을 밟으면서 짐을 날랐었다.
선생님에게는 나보다 네댓 살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인 심심하다고 자주 칭얼대곤 했다.
"엄마, 힘들어"
"엄마 조금 있으면 끝나겠다. 쫌 만 더 참아줘"
선생님은 그렇게 아들에게 꼼짝 못하시며 늘 달래며 일을 보셔야 했다. 이 꼬마 녀석은 엄마를 따라 종종 학교에 와있곤 했다. 나에겐 동생을 잘 돌보는 기술이 있었기에 이 녀석을 살뜰히 돌보아주며 선생님의 마음을 샀다. 그게 통한 탓인지 심부름을 시키실 때면 나를 자주 부르셨고 수업이 끝나면 남아서 선생님을 도와 달라고 하셨었다. 그럴 때면 내가 선생님과 특별한 사이가 된 것 같아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6교시 이후 형광등도 켜지 않은 교실에서 선생님과 둘이서 남아서 선생님은 일을 보시고, 나는 칠판에 내일 수업시간에 배울 내용을 판서하곤 했었는데, 그때 내가 칠판에 얼굴을 딱붙이고, 백묵으로 큰 칠판에 개발새발 글을 썼던게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다 쓰고 난 뒤에서 보면 글씨는 하늘을 향해 조금씩 올라가서 도저히 못봐줄 정도였지만, 선생님은 그 일은 내게 자주 시키셨었다. 왜 그러셨을까?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이다.
나는 1학년 초, 수업 중 화장실을 다녀오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해 교실에서 실수할 정도로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당시 똥 싼 애로 불리며 한동안 기피 대상이 됬던거 같다. 그 뒤로 4학년 때까지 어찌나 조용하게 지냈는지 도통 기억나는게 없다. 반면 5학년부터는 모든 것이 하나하나 기억난다.
전근오신 선생님은 아무런 정보도 편견도 없는 이유에선지 아니면 모든 아이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는 늘 아낌없이 칭찬해 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칭찬으로 조금씩 자라는 화초 같았다.
그중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방학 때마다 나눠주는 탐구생활에는 맨 마지막 문제로 심화활동 부분이 있었는데, '나무의 눈을 관찰해 보시오. 곤충을 관찰해 보시오' 식의 무언가를 관찰해 보라는 제안이 있었다. 대부분 친구들은 심화활동 이전까지만 풀고 심화활동은 의례 건너뛰었다. 나는 그 해 방학 때 심화 활동까지 열심히 하느라 나무의 눈을 직접 따서 반으로 갈라 테이프로 붙이고, 나뭇잎이며, 곤충이며 책에 하라는 대로 모든 것을 갖다 붙여서 학교에 가져갈 때 즈음엔 탐구생활 책 아랫부분이 임산부 배마냥 불룩해져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부르시고 앞으로 나와 서게 하셨다. 그리곤 내 탐구생활을 한 장 한 장 펴서 반 친구들에게 보여 주시며
"선생님 하면서 이렇게 탐구생활을 열심히 해 온 학생은 처음 보았어요. 아주 잘했어요"
라고 얘기 하시면서 내 방학 과제를 모두에게 한장한장 펼쳐 보여 주셨다. 선생님 옆에 나란히 서서 칭찬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던 그날은 나에게 정말 특별한 날로 기억되어 있고, 그때의 짜릿함이 지금도 생생하다. 숨죽여 바라보던 반 친구들 표정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가슴은 기분 좋게도 두방망이질 해댔었다.
그 뒤로도 선생님은 기회만 되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 영이는 이목구비가 예뻐서 안경을 써도 예쁘구나" 5학년 말 즈음부터 안경을 썼는데. 처음 안경을 쓰고 학교에 가야 해서 속상했던 날도 칭찬해주셨으니 5학년의 모든 기억이 선생님의 칭찬뿐이다.
작은 것에도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는데 그건 칭찬이 아니라 선생님의 사랑이었다. 선생님의 사랑은 나를 흑백 세상에서 컬러 세상으로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바뀌는 것처럼 세상을 다르게 보게 했다. 그 뒤로 나는 수다쟁이처럼 말도 많이 했고, 많이 웃었고, 친구들을 많이 웃겨주기도 했다. 그즈음에 단짝 친구도 생겨서 학교생활이 더없이 즐거웠다. 선생님은 그렇게 딱 1년을 계신 뒤 다시 광주로 떠나셨던 것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뒤로 학교에서 뵙지 못했던 것 같다. 광주에서 나를 구하러 오신걸까.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노래가사처럼 나의 바람이 광주에 있는 선생님을 이곳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떠오른 선생님 존함을 교육청의 스승 찾기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 정보도 없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실 수도 있고, 퇴직하신 뒤에 정보를 지우셨을 수도 있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생생하게 그 모습 그대로 웃고 계신다. 선생님 덕분인지 나도 누군가를 흔들어 깨우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한동안 초등학교에서 가르쳤었는데,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 아이들의 눈을 보면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며 선생님만 바라보고 있던 내가 보여서 그 친구의 이름을 불러줬다. 말썽꾸러기 녀석을 보아도 그 녀석 안에 있는 불만 가득한 내가 보인다. 그래서 한마디라도 격려하고 무엇이라도 찾아서 칭찬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녀석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부끄러워하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그렇게 선생님께 진 빚을 갚아가려 노력해 본다. 선생님처럼 누군가의 기억에 또렷이 남겨진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인생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