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두려움은 같은 말이 아닐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 솜이가 아팠다.
(*키우는 강아지이자 내 딸이자 내 삶의 전부)
어릴 때부터 위가 안 좋아서 툭하면 먹은걸 소화하지 못하고 게워내기 일쑤였는데, 또 밤새 토를 해댔다.
간단한 채비만 하고 나선 외출이 길어지는 바람에, 급한 대로 편의점에서 산 간식을 밥 대신 먹인 것이 화근이었다.
이미 저녁때 쇼파에 한 차례 게워냈는데도 불구하고, 새벽 한시쯤 자다 일어난 솜이가 또 울컥울컥 토를 쏟아냈다.
물론 자주 겪던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지나치게 큰소리를 내거나 과하게 반응하면 안 된다. 솜이를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내 몸에 편히 기댈 수 있도록 가까이 앉은 뒤 진정될 때까지 앞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과호흡이 오면 코에 바람을 살짝 불어넣어 주는 것도 좋다.(물을 마시면 제일 좋겠지만 속이 안 좋은 상태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입에 넣으려 하지 않는다.)
솜이는 토할 것 같거나 몸이 아프면 내 곁에 꼭 붙어있으려는 습관이 있다. 오늘 역시 끅끅대면서도 내 무릎 위로 한 발 한 발 올라와 앉길래 바닥을 닦는 건 잠시 미뤄두고 그대로 솜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참 다행인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아프면 구석으로 숨어버리는 강아지들도 많다고 한다. 아픈 것을 빠르게 알 수 있고 또 도움을 줄 수 있기에 나에게 와주는 것이 오히려 고맙다.)
그렇게 한참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미안해."
"아프지 마, 엄마가 대신 아플게."
같은 말을 솜이에게 건넸다.
그러다 순간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눈물이 났다.
이 조그만 아이가 아픈 게 너무 속상하기도 했고,
그와 동시에 내가 아팠을 때 나에게 똑같은 말을 했던 엄마가 떠오르기도 했고,
이렇게 대신 아프고 싶을 정도로 이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랑은 커지면 커질수록 작디작은 유리구슬과 같아서 빛나고 예쁘지만, 쉽게 굴러가 잃어버리진 않을지, 어딘가에 부딪혀 깨지진 않을지 늘 두렵다.
엄마가 자신이 대신 아프고 싶다고 할 때마다
질색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정말 진심으로 내가 대신 아파줄 수만 있다면,
그게 가능만 하다면, 제발 그러고 싶었다.
엄마도 구슬이 깨질까 두려웠을까. 난 고작 2년 반을 함께한 강아지를 보면서도 이런 기분이 드는데, 엄마는 어땠을까.
토로 범벅된 바닥 한가운데 앉아 솜이를 끌어안고 조각난 생각들을 한참이나 흘려보냈다.
그러다 사랑도 결국은 두려움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대신 아프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몹시 사랑한다면,
그와 동시에 이 사랑을 잃을까 봐 몹시 두렵기도 하다. 사랑에 있어서 두려움은 필연적인 존재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이 나와 평생을 함께할 수는 없다는 것이 두렵다.
부모님이 나보다 오래 살 수도 없고, 강아지가 인간보다 수명이 길 수도 없다.
언젠가는 꼭 끝이 존재한다는 것이 두렵다.
인생에 있어 필연적인 상실들이 두렵다.
왜 두렵냐고 묻는다면,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고 밖에 대답할 수가 없다.
사랑은 삶에 활기와 행복을 불어넣지만, 동시에 내 약점이 되어 내 자신을 유약하게 만들고 또 두렵게 한다.
이 두려움을 안고도 사랑을 하는 까닭은,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겠지.
가슴 깊숙이 찔러오는 두려움보다
사랑이 주는 힘이 더 커서겠지.
그렇다면 두려움보다 그 힘에 집중해
현재를 후회 없이 살아야겠지.
이 모든 해답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과 두려움이 가진 동일한 무게에 짓눌려
가끔 모든 생각이 멈춘다.
사랑이 가진 또 다른 이름이 두려움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또 유리구슬을 손에 쥐고 살아가겠지.
다들 이렇게 사는걸까.
오늘의 이상한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