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기
어제의 사고는 뒤로하고 오늘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다행히 날은 어제만큼이나 맑았다. 오늘은 서귀포 지역의 마지막 날이었기에 숙소의 짐을 하나 줄 정리해야 했다. 꼴랑 배낭 두 개 매고 온 제주도였건만 뭐 이리도 널어놓은 게 많은지. 꾸역꾸역 전보다 늘어난 짐을 배낭에 욱여넣고 집을 나선다.
서귀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이중섭 미술관이었다. 서양 미술사에 '반 고흐'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 사람이다 할 정도로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그림의 주인공. 돈이 없어서 담뱃갑 은지에 그림을 그렸다지만, 지금은 의무교육의 미술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대표 화가. 이중섭 화가의 제주도 시절 생가 근처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으며, 그의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도 있었다. 삼성에서 기증한 그림 수 점이 전시되어있다는 안내문구가 인상적이었다.
미술관을 입장하기 위해서는 온라인으로 예약을 해야 했다. 당시에는 예약 자체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예약된 시간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는데,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도 좋았고, 미술관에 바로 연결된 '이중섭 생가' 근처의 길이 너무 예쁘게 만들어져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할 수 있었다.
미술관 안의 그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뭐 이런 작은 미술관이 소유할 만큼 만만한 그림 가격도 아닐 터이니, 아마 이번에 삼성그룹에서 기증한 몇 점이 전시된 그림의 대부분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미술관에서 집중한 건 화가 이중섭의 그림이 아닌, 인간 이중섭의 삶이었다. 민족적 비극이 휘몰아치던 시기에, 처자식과 떨어져 그들을 그리워하며 그들과 함께 사는 삶을 그림으로 그려온 한이 가득한 삶.
문득 가족들과 떨어져 캐나다라는 먼 땅에서 그들을 그리워하며 잠들던 나날이 생각이 났다. 그때는 한국의 가족들과 밥 먹고, 산책하던 그 일상들이 너무도 사무치게 그리웠더랬다. 그랬기에 그의 삶을 읽고 그의 그림을 보며 눈물이 찔끔 났던 것 같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한국에 오기 전 토론토의 AGO에서 본 앤디 워홀 전시에서 접한 앤디 워홀의 삶과 많은 비교를 하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지만 깊었던 그림 감상을 마치고, 우리는 성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성산으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버스는 가는 곳마다 기분 좋은 경치를 제공했고, 우리는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풍경을 풍경이고 피로는 피로인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어느 바닷가 마을의 풍경이었다. 지도 앱을 켜니 슬슬 목적지에 다 와감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성산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성산 일출봉 바로 인근에 위치한 마을 성산리. 그곳의 첫인상은 조금 애매했다. 분명히 많은 가게들과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건만, 딱히 갈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깔끔하다 못해 힙해 보이기까지 했던 서귀포 이중섭 거리와 비교하면 괜히 여기까지 왔나 싶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출발 전 점찍어놓은 숙소는 빈 방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하며 멘붕에 멘붕을 더했다. 그렇게 털래털래 걷고 있을 때쯤, 나의 아랫배에서 강력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건 조금 급한 것이었다. 급하게 들어갈만한 곳을 찾아보았지만 딱히 보이지도 않았다. 등 뒤로 식은땀을 뿌리며 뛰듯이 걷던 와중 하나의 건물이 눈에 띄었다. '성산 하루'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아내에게 주문을 맡기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일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가게의 내부가 그제야 보였다. 레트로 한 감성의 인테리어들이 여기저기 자리한 따뜻한 분위기의 아늑한 카페였다. 심지어 커피도 맛이 있었고, 아내의 말로는 단 빵들도 맛이 좋았다고 했다. 뭐 그런 거 다 차치하고서라도 나에게는 구세주 같은 곳이었다.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의자에 눕듯이 앉아 오늘 밤 잘 곳을 검색한다. 마침 가까운 곳에 괜찮아 보이는 숙소가 있어 바로 예약을 했다. 햇빛에 녹어 늘어질 대로 늘어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숙소로 향했다.
카페로부터 3분 거리의 숙소에 도착하니 아직 체크인 시간이 안 되어 가방만을 맡기고 성산 일출봉으로 향했다. 십 년도 전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가 보았던 그곳, 11월임에도 아직 푸릇함을 유지하는 드넓은 초원 위로 느닷없이 솟아있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모습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 일종의 경외를 느끼게 한다. 그 성스러운 영산을 바로 바라보며 돈가스를 먹을 수 있는 곳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깨끗한 창 너머로 성산 일출봉의 모습을 보며 먹는 맛은 유명 돈가스 집 '연돈'의 맛과 비견할만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나는 연돈에서 돈가스를 먹어본 적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체크인을 한 뒤 올라가 짐을 풀었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넓은 방이었다.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잠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밖으로 나왔다. 해지는 성산을 배경으로 천천히 산책을 했다. 바다와 성산을 사이에 두고 잘 닦여 뻗어있는 자전거 도로가 썩 마음에 들었다. 내일도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저녁은 블로그를 뒤지며 고르고 고른 곳으로 정했다. 세, 네 팀 정도 들어가며 가득 찰 것 같은 작지만 굉장히 느낌 있어 보이는 가게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자리가 모두 차있어 잠시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 뒤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으니 역시나 멋으로 가득한 인테리어가 우릴 반겼다. 유명하다는 부추잡채와 날개 만두를 시키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흥분해서 시켜보았다. 곧 두 사람이 비좁게 앉은 작은 테이블 가득히 음식이 찼다. 주변을 보니 이렇게 한 번에 많이 시키는 건 우리뿐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들 조금씩 시켜서 먹고 추가로 주문하는 방식으로 음식을 시키고 있었다.
음식 맛은 놀랍게도 그냥 그랬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맛이 있지는 않았다. 아무리 봐도 냉동만두 같았고, 아무리 먹어봐도 미원 맛이 너무 강했다. 물론 이런 곳에서 파인 레스토랑급의 음식을 기대하진 않지만 이런 장소에서, 이 가격에, 이 퀄리티는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싶었다. 호기심에 시켜 본 술 '니모메'가 맛이 좋아 위안이 되었지만, 그나마도 추천을 부탁했음에도 설명을 제대로 못하는 점원분의 모습에 이름이 예뻐서 시킨 술이었다.
큰 기대는 그만큼의 실망으로 돌아왔지만, 숙소로 향하는 길 볼을 스치는 제주의 시원한 밤바람에 그마저도 날아가버렸다. 돌아가는 내내 입에 붙어있던 불만은 어느새 내일 여행의 기대로 바뀌고, 실망은 기대가 되어 무거웠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그렇게 또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