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안일 하는 남자 Feb 04. 2022

제주도 넷째 날(하)

제주도 여행기

"여보, 이거 안돼."


문제가 생겼다.

목 뒤가 뜨끈해지면서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조금 아까까지만 해도 잘 돌아가던 아내의 전기자전거의 전원이 갑자기 켜지지 않는다. 


문득 머릿속으로 하나의 장면이 스쳤다. 아까 전 자전거를 세우고 보도블록으로 올렸을 그 순간.

나는 보통 단차에 체인이 스치는 게 싫어 자전거를 들어서 옮기지만, 아내는 그런 거 없이 그냥 바퀴를 끌어올린다. 그래서 종종 보도블록의 경계석에 체인이나 프레임이 긁히고는 했는데, 조금 전 자전거를 보도블록으로 옮길 때 역시 같은 일이 벌어졌었다. 그리고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아내의 전기 자전거를 눕혀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래쪽 프레임에 배터리와 전원을 이어주는 선이 있었고, 그 부분이 경계석에 긁히면서 부서져버린 것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속으로 되뇌며 부서진 게 아니라 그냥 충격에 빠진 것이리라 이리저리 맞춰보고 끼워보았지만, 그럴수록 이것이 이미 되돌릴 수 없이 부서졌다는 확신만 더해졌을 뿐이었다. 일단 사정을 알려야 하기에 사장님에게 전화를 드렸는데, 반응은 사장님도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다는 반응. 일단은 가게로 가져가 확인을 해야 했기에 차를 보내준다고 하셨지만, 그렇게 되면 사장님이 가게를 잠시 닫으셔야 했기에 최대한 가게 폐점시간 전까지 이쪽에서 자전거를 끌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전기 자전거 전기 없이 타기'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조금 전 '아, 경사가 가파르네. 전기자전거 아니었으면 큰일 났겠다.'라고 생각하며 하하호호 올라갔던 그 경사들이 고스란히 나의 앞을 가로막는다. 큰일이 났다. 그것도 꽤 자주. 심지어 자전거는 미니밸로 스타일이라 기어는 작고, 페달은 불편했다. 차라리 일반 산악자전거였다면 편했겠지만, 그렇지도 않았으며,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 모터와 배터리는 터무니없는 무거움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페달을 밟았다. 계속 밟았다. 이따금 말도 안 되는 경사가 나올 때면 내려와 끌고 올라갔다. 저 멀리 해가 지는 게 보였다. 맑은 하늘 아래 뉘엿뉘엿 해지는 제주의 풍경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웠다. 그런 나를 보는 아내는 그야말로 좌불안석, 이미 절반쯤 눈물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심경은 솔직히 조금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모터에 의지하며 밀리는 듯 나아가던 자전거 비스무리한 어떤 것이 아닌 이제야 제대로 된 자전거를 타는 기분이 들었다. 터질 것 같은 허파와 고통을 호소하는 허벅지의 감각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제야 느꼈다.


'아, 나 자전거 좋아하는구나!'


우여곡절 끝에 폐점시간 전에 자전거 대여소로 도착할 수 있었다. 제때 도착한 우리에게 약간의 놀람을 표한 사장님은 곧장 망가진 전기 자전거의 상태를 보고는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지은 죄가 많은 우리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뿐이 할 수가 없었다. 파손부위는 치명적이었고, 가게에서 수리는 불가능하며, 견적도 공장에 보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수리비를 당장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는데, 사장님이 추천한 방법은 일단 수리비의 최댓값을 우선 사장님께 먼저 드리고, 이후 수리비가 확정되는 대로 차액을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바로 송금해드리고, 이후 연락을 받는 것으로 결착 지었다. 사실 이런저런 수고에 더해 한 대분만큼의 손실이 더해지는 일이지만, 이 모든 걸 감당하시고 그저 수리비만 청구하신다는 사장님의 배려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게 사고를 마무리 짓고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하늘은 어둑어둑, 우리의 마음도 깜깜한 밤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 뭐 어찌하겠는가. 서로를 애써 다독이며 터덜터덜 이중섭 거리를 오르다 문득 발견한 공방이 하나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볼펜을 팔고 있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시간을 들여 응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장님이 입담이 좋으셔서 절로 대화에 빠져들게 만드는 스타일? 덕분에 축 쳐졌던 기분도 조금 나아지고, 아내의 볼펜도 하나 구입할 수 있었다.


그날의 저녁은 숙소 인근에 위치한 교촌치킨을 포장해서 먹었다. 치킨을 기다리는 동안 생맥주를 하나씩 시켜 마시며 서로 간의 속내를 조금 풀어보았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맑게 갠 하늘로 시작한 하루가 즐거웠고, 아름다웠으며, 어느 순간 왜 이런 불행으로 돌아오는가 했지만, 결국 다시 즐겁게 끝나간다. 


오늘의 여행도 행복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도 넷째 날(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