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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나의 가능성

책을 읽는 이유

by COSMO
책은 씨앗과 같다. 수세기 동안 싹을 틔우지 않은 채 동면하다가 어느 날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도 갑자기 찬란한 꽃을 피워 내는 씨앗과 같은 존재가 책인 것이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 '과학자'라는 단어는 꿈 많던 어린 시절의 필자에게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들은 TV에서나 등장했던 로봇도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불우한 과거를 가진 주인공에게 악당을 물리칠 멋진 무기와 동료를 만들어준 OOO 박사들은 모두 과학자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대부분의 것들(공룡, 화산, 우주, 비행기, 폭탄, 전자기기)은 모두 과학 혹은 과학자와 연결되었다. 어른들이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대답은 당연히 과학자였다. 하지만 드라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꿈은 그냥 꿈으로 남았다.


유수 같은 세월이 흘러 '내'가 그리 특별하지 않음을 깨닫고 과학이 아닌 공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자'가 붙은 학과가 취직에 유리하다는 이상한 조언은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학과 군대 그리고 직장을 근근이 버티는 생활은 미래의 성공한 '나'를 상상하며 간신히 이어졌다. 그런데 호수의 잔잔함처럼 평범한 어느 날, 우연히 펼친 『코스모스』(사이언스북스, 2006)는 작지만 깊은 파장을 일으켰다. 책 속에 있는 칼 세이건의 차분한 문체는 토닥거림처럼 느껴졌고, 우주를 아우르는 지적인 문장은 배움이 되었으며, 신비로운 우주 이야기는 따뜻한 추억이 되었다. 특히, 책은 씨앗과 같다는 천문학자의 말은 구내식당 수요일 점심 메뉴처럼 뻔한 일상을 보내던 필자의 마음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해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도전정신이 투철한 당신이라도 매번 접하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산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이럴 때 가장 접근하기 쉬운 대안이 바로 독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자기 생각이나 결정과 비교하면서 간접적이지만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실용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쉽고 빠르게 이해되는 분야의 책과 그렇지 못한 분야의 책이 있다. 자연스럽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간접 경험으로의 독서는 생각보다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똑같은 위기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를 이미 겪어본 사람과 모든 것이 생소한 사람 사이의 차이는 불 보듯 뻔하다. 라면 냄새라도 맡아본 사람이 그조차 해보지 못 한 사람보다 생존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또한, 객관적인 상황 판단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분석은 문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을 때 가능하다. 문제를 한 발짝 떨어져서 고찰하는 과정은 독서를 통해 등장인물을 관찰하고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통한 사유의 과정이 직접적인 체험보다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주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독서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진 한계를 극복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뇌과학적으로 가능성의 본질은 결국 뇌 가소성(Plasticity)이다. 『책 읽는 뇌』에서 매리언 울프는 "가소성은 뇌 구조의 핵심적 특성으로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이루는 많은 것의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뇌는 기존 구조 안에서 뉴런 간의 새로운 연결(Synapse)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뇌가 경험에 따라 형태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간접적인 경험, 다시 말해 독서는 제한된 인간의 활동에서 뇌의 복합적인 가소성을 형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다. 책을 읽는 행위가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이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셈이다.


미엘린(Myelin)이란 뉴런 사이의 연결 부위를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절연체를 말한다. 여기서 잠깐, 기본적인 전자기학 공식을 잠깐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 I = V/R(V: 전압, I: 전류, R: 저항),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저항이 적을수록 전류가 잘 흐른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한 가닥의 전선보다 여러 겹으로 된 두꺼운 전선에서 전류의 흐름이 보다 원활하다는 말이다.


우리의 뇌에서도 정보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뉴런 간 전기적 신호가 잘 전달돼야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뉴런 사이의 연결 부위가 미엘린이고, 미엘린이 두꺼울수록 전기적 신호가 더 빨리 그리고 더 정확하게 전달된다. 대니얼 코일은 그의 저서 『탤런트 코드』(웅진지식하우스, 2021)에서 "미엘린은 전선의 플라스틱 피복과 마찬가지로 신경세포를 둘러싸는 백색 지방질 물질로, 뉴런을 통해 전달되는 신호가 누출되지 않게 보호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 뇌의 미엘린을 두껍게 만드는 방법이 바로 독서를 통한 반복적인 간접 경험이다.


독서는 자신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하는 최적의 도구이자 방법이다.


지겹도록 평범한 필자의 일상에 작지만 깊은 파문을 일으킨 것은 칼 세이건이라는 천문학자가 저술한 책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한 미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과학자가 되지 못 한 사람이 과학자가 쓴 과학책을 읽고 감명받았다는 현실이 조금 씁쓸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처음 쓴 글이 바로 『코스모스』에 관한 짧은 서평이었다. 독서와 필자의 인연은 브런치에서 글쓰기까지 이어졌고, 언젠가는 '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꿀 정도로 발전했다. 감옥 가는 기분으로 출근했던 월요일 아침보다는 훨씬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이렇게 독서는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라는 것을 필자는 직접 경험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할 때, 훌쩍 혼자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맛있는 것을 먹을 수도 있고, 오래된 친구를 만나도 좋다. 사랑하는 나의 반려견과 가볍게 산책하러 나가도 좋고, 그냥 멍을 때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마지막으로 정말 할 게 없다면, 책을 펼치는 것을 추천한다. 무슨 책이든 상관없다. 그리고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으며 한 문장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은 그렇게 시작된다. 책을 펼치는 것은 곧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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