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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나를 안아준다

by COSMO

가장 깊은 밤, 가장 솔직한 나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어둠이 나를 맞았다. 불을 켜지 않은 채 구두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그대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만든 그림자 속에서, 오늘 하루가 천천히 되감겼다. 오전에 놓친 중요한 이메일, 점심 약속에 늦어 헐레벌떡 뛰어간 일, 오후에 클라이언트와의 통화에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순간들. 하루의 실수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프리랜서가 된 후로 이런 날이 잦아졌다. 회사에 다닐 때는 적어도 퇴근이라는 명확한 경계가 있었지만, 지금은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져 늘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주방으로 향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형광등 빛이 얼굴을 비추는 순간, 문에 붙여둔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한 걸음.' 언제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내 글씨였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 남긴 흔적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며 숨을 고른다.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찬물에 얼굴을 담그자 하루의 긴장이 서서히 풀어졌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마주했다. 피곤해 보이는 눈가, 며칠째 제대로 다듬지 못한 수염, 그럼에도 여전히 나인 이 얼굴.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거울 속 나에게 작게 미소 지었다. 완벽하지 못했던 오늘도, 결국 내가 살아낸 하루였다. 이제 침실로 향하며 생각했다. 오늘 밤은 나를 탓하는 대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싶다고.


작은 승리들의 목록


침대 맡 서랍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하루 세 줄 일기'라고 적힌 표지가 손때로 번들거렸다. 무작정 펼친 페이지는 작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오늘 드디어 첫 원고료 입금. 13만 원이지만 내가 번 돈. 라면에 계란 두 개 넣어 먹음." 그 짧은 기록을 읽으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의 설렘이 아직도 생생했다. 지금은 그보다 많은 원고료를 받지만, 첫 13만 원의 감동을 따라갈 수 있을까.


오늘의 페이지를 펼쳤다. 펜을 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적기 시작했다. "카페 사장님이 '요즘 자주 오시네요' 하며 쿠키 서비스. 처음으로 단골 인정받은 기분." 별것 아닌 일이지만, 적고 나니 하루가 조금 달라 보였다. 이어서 적었다. "버스에서 할머니께 자리 양보. '고맙다'고 하시며 손 꼭 잡아주심." 그리고 마지막 줄. "저녁에 동생이 보낸 웃긴 밈. 오랜만에 배꼽 잡고 웃음." 세 줄을 채우고 나니, 실패로 가득했다고 생각한 하루에도 이만큼의 따뜻한 순간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우리는 실패를 세는 데는 전문가지만, 작은 승리를 기억하는 데는 서툴다.


침대 시트를 정리하며 오늘 하루를 다시 생각해 봤다. 놓친 이메일 때문에 프로젝트가 무산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클라이언트가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라고 정중히 답했다. 점심 약속에 늦었지만, 친구는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와"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통화에서 완벽하게 대답하지 못했어도, 상대방은 "충분히 이해했어요"라고 말했다. 내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동안, 세상은 생각보다 관대했다. 베개를 뒤집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오늘도 나름대로 잘 살아냈구나.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도시의 밤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불완전했지만 충분했던 하루가 고요히 잠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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