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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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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낭토끼 Mar 11. 2022

엄마 일기

둥지를 떠나는 아기새를 대하는 엄마의 마음

 아이가 학교에 입학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이가 학교에 첫발을 디딘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큰일인지 나의 아이의 입학에 축하를 전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나는 사실 취학통지서를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주위를 보면 취학통지서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런 서류로는 감정 전달이 안되는 것인지 아니면 실감이라는 것이 나지 않아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취학통지서에 배정받은 학교로 입학할 예정이 아니라서 그런지 취학통지서는 그냥 내가 아이의 입학을 위해 제출해야 할 서류 중 하나로 느껴졌다.

 

 나는 아이를 취학통지서에 통지받은 학교에 입학시킬 생각이 없었다. 시국도 시국이지만 조카가 다니는 작은 학교가 시스템도 그렇고 지원도 그렇고 여러 가지면에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조카가 다니는 학교에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뭐든 쉽게 가는 법이 없다. 나 말고도 지원한 학생이 많았다. 3:1의 경쟁률로 추첨에서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또 한 곳의 집 주변 작은 학교에도 지원을 해야 했다. 나의 마음속 1순위는 조카가 다니고 있는 학교였다. 아이 역시 매일 보는 오빠가 그곳에 다니고 있으니 당연히 그곳에 입학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추첨의 결과는 처참했다. 합격 공은 하나가 남고 나머지 두 개의 공은 대기가 남은 상황에 내가 추첨 통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대기 번호가 있는 공을 뽑고 말았다. 그 이후로 엄마는 아이에게 똥 손이 되었다.

혹시나 해서 넣었던 또 따른 작은 학교는 도저히 내가 추첨을 갈 수 없었다. 2순위이었던 학교는 신랑이 가서 추첨을 했고 단번에 합격 소식을 전하였다. 원하던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기라도 보내게 되어 참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초등학교라는 곳이 원래 그렇게 정보가 하나도 없는 곳인지 아이가 입학하는 그 순간까지 돌봄 교실 방과 후 통학버스 모든 것이 처음인 아이와 똑같이 모든 것이 처음인 엄마와 아빠는 당황스러움에 연속이었다. 설명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안내를 해주는 안내장도 없었다. 학교에 입학하는 그 순간까지 결정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통학버스를 이용해 등하교해야 하는 아이의 시간이 정해지지 않자, 일하는 엄마로서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입장에서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격이 급한 나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유별난 엄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학교로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직 미정이라는 대답뿐이었다. 아이의 등하교만큼은 꼭 함께 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속 터지는 대답에 또 한 번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의 답답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야속하게도 잘만 지나갔다. 아이의 입학식 전날 등하교 시간이 정해졌고 하교 시간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서 해야 했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는 아이를 응원하기도 벅찬 나에게 아이의 하교시간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주말부부로 신랑도 없는 이 시점에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나 혼자 챙겨야 하니 스트레스는 배가 되었다. 결국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나에게 병이 되어 참 정직한 몸뚱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출근이 늦다 보니 등교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이의 하교가 걱정이라 학원을 갔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원을 다녔으면 하는 뜻을 이야기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싫다고 대차게 거절하였다. 아이의 대찬 거절에 엄마는 점점 자신을 잃어갔다. 그냥 처음부터 바로  학교를 보냈어야 하는  아니었는지, 괜히 엄마의 잘못된 선택으로 상황이 이렇게  것은 아닌지 그때부턴  자신을 채찍질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상황이 화가 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학교는 일처리가  이렇게 느린 것인지 시스템을 한탄하기도 했다. 아이가 학교로 첫발을 내디딘  시점에 돌아가는 상황이 하나부터 열까지 고구마 백만 개를 먹는  같은 답답함이 지속되니 엄마는 엄마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엄마의 걱정과 다르게 학교에 잘 적응해주었다. 매일 학교 가는걸 즐거워했고, 친구들과 잘 지내며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밥이 나왔는지 퇴근하고 온 엄마에게 조잘조잘 떠들어주었다. 고구마 백만 개는 먹었던 엄마의 답답함은 아이의 조잘거림에 조금씩 풀렸고, 엄마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게 자라준 아이에게 너무 고마웠다. 이렇게 아이가 나의 둥지를 떠나갈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대견하기도 하면서 서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 남매의 엄마였던 엄마에게 나의 입학은 어떤 날이었을까. 초등학교 때의 기억을 되살려보자면 엄마는 학교에 오는 일이 없으셨다. 소풍과 운동회를 제외하고 엄마가 학교에 온 날이라면 입학식과 졸업식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마는 학교에 전화조차 하지 않으셨었다.


 내가 넷째라 위에 언니들도 알아서 잘하였으니 나도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러셨던 것인지 아니면 첫째부터 당연히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니 정보란 것이 넘쳐나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보는 눈에 엄마는 적어도 모르는 것이 없었고, 학교에서 내가 가지고 오는 가정통신문을 꼼꼼하게 체크하시는 일도 없었다. 우리 때는 예방접종을 학교에서 한꺼번에 맞았는데 엄마는 그런 예방접종도 학교에서 가지고 오는 신청서라면 그냥 전부 신청해서 보내셨다. 알고 하신 건지 아니면 학교에서 알아서 보내는 것이니 다 신청하면 된다는 생각에 그러신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아무튼 나에게 엄마는 나의 학교생활과 친구관계에 대해서도 먼저 물어보는 법이 없었던 엄마였다.


 엄마는 단순히 오 남매라서 그랬던 것일까, 처음 제일 큰언니를 학교에 보낼 땐 엄마도 나처럼 학부모는 처음이라 많이 당황하셨을까?! 하지만 내가 보는 눈에 엄마는 적어도 당황함이라는 걸 본 적이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태연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큰둥한 엄마였다. 엄마의 표정을 숨기는데 익숙해 셔 그러셨던 것인지 아니면 엄마가 원래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어렸을 땐 그렇게 섭섭하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은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된다.


 나도 내가 엄마로서 덤덤하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고 지나치고 싶을 땐 엄마를 떠올리게 되는 지금의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엄마는 큰언니부터 차례로 다섯 번의 경험을 하니 우리 오 남매의 입학이 오 남매의 학교생활이 그저 그런 일상이 된 것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섭섭했던 나의 마음과 별개로 지금은 그런 엄마의 덤덤함이 조금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가 나와 꼭 같은 마음이었을 리는 없지만 만약 같은 마음이었다면 나도 언젠가 엄마처럼 무덤덤하게 조금은 태연하게 아이가 둥지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시린 겨울나무 같은 마음보다는 따듯한 봄날에 새싹이 움트는 것 같은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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