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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 May 02. 2022

타임푸어의 호텔여행

1년에 70일 가량을 호텔에서 보내는 시간빈곤자 직장인

타임푸어. 시간 빈곤자.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함축하여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눈 뜨면 회사에 가고, 집에 돌아오면 다음날 출근하기 위해 잠을 청하는 지극히 습관적인 일상. 그 속에서 주어진 자유시간이라고는 일 년에 고작 열몇 개 밖에 안 되는 연차뿐이었고, 그 마저도 연휴나 주말에 붙여쓰기 위해 온갖 눈치작전을 동원해 아등바등했었다.



이런 월급쟁이적인 삶을 스스로 자조하다가도, 어렵게 만들어낸 휴가기간에는 오로지 열심히 해외여행에 나서곤 했다. 보상심리를 분풀이라도 하듯 퇴근 후 곧장 공항으로 향해 비행기를 타야만 했고, 휴가 기간을 꽉꽉 채워 여행지를 돌아다니다가 출근 전날 빠듯하게 귀국해야만 휴가를 알차게 잘 보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여행의 전환점


2018년 여름. 남편과 함께 다녀왔던 런던 여행은 여느 때처럼 빡빡한 일정이었다. 런던이 처음이었던 남편을 위해 초심자용 관광지를 죄다 훑었고, 학생 때 내가 잠시 살았던 동네에 가서 추억놀이도 했으며, 여행 전 SNS를 열심히 뒤져가며 만들어간 힙한 맛집 리스트 도장깨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런던에 살고 있는 친구 부부도 만나고, 당일치기로 에든버러까지 기차여행도 다녀왔다. 시간 빈곤자의 여행답게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고 자부할만한 그런 일정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열심히 여행한 탓이었을까? 귀국행 비행기 안에서부터 꿈틀 대기 시작한 부정적인 감정은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어느새 불안감으로 바뀌어 스멀스멀 몸 밖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런던에 있었다는 사실이 마치 아득한 꿈처럼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고, 다시 몇 시간 뒤면 출근길 지하철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젠 정말 현실로 복귀할 순간임을 알려주는 인천공항의 공항철도 게이트가 마치 요단강으로 향하는 저승 관문이라도 된 것 같았고, 빨래가 한가득 들은 캐리어는 나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 같아서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너무 피곤하고 피로했다.


여행과 현실의 갭이 클수록 여행의 끝은 괴로웠다 @런던 그리니치, 2018



돌이켜보면 여행이 곧 휴식이자 취미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일상이 고단하다고 매일 투덜거리면서도 진정한 휴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러면서도 쉴 때 뭐하냐는 질문에는 언제나 '여행'이라고 답했었다. 일 년에 서너 번 가는 해외여행을 나의 진정한 '취미'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한 번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그저 일상 밖 특별한 무언가를 경험하는데서 고단한 일상을 보상받고자 했던 것 같다.



2차 대전 때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들은 수용소에서 혹독한 노역에 죽어가면서도 밤늦게 모여 정신세계와 예술을 토론했다고 한다. 밥만 먹고 일만 하는 생물체가 아니라, 지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필요 때문에 말이다. 어쩌면 나도 회사집회사집만 하며 사는 급여 생활자 일지언정, 향유할 취미가 있는 현대인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호텔 여행의 시작


유독 여독이 심했던 그해 여름의 런던 여행 이후, 해외여행 대신 눈을 돌리게 된 곳이 바로 도심 호텔이다. 호텔에서 지친 일상에 대한 심적 보상을 발견했다거나, 호텔이야말로 고상한 휴식을 즐기는 현대 인류임을 느끼게 해주는 장소라거나 하는 거창한 무언가가 있던 건 아니다. 그저 후유증이 수반되는 강렬한 해외여행 한방 대신 그 즐거움을 잘게 쪼개서 자주 즐겨보자는 단순한 계산이었고, 그 수단으로써 도처에 널린 호텔들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집 놔두고 집 근처 호텔에서 자는 모양새가 조금 어색했지만, 인간은 원래 좋은 것에는 빠르게 적응하는 법이므로 곧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에 서너 번 가던 해외여행은 한 달에 서너 번 호텔로 향하는 '작은 여행'으로 바뀌었고, 처음 의도했던 대로 작지만 잦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작은 여행을 자주 한다고 해서 진정한 휴식과 취미에 대해 깨닫게 되거나 했던 건 아니다. 장소만 해외에서 국내 호텔로 바뀌었을 뿐, 일상의 행복을 일상 밖에서 찾으려 했던 예전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도심 호캉스 역시도 작은 일탈 정도로 여기고 그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미리 조사해 온 호텔 주변의 가볼 만한 곳들을 마치 숙제처럼 순례했고, 호텔 클럽 라운지의 애프터눈 티 타임, 해피아워, 조식까지 풀로 즐기고 그 사이사이 비는 시간마다 수영장, 사우나, 피트니스 등 호텔 부대시설을 즐겼다.


부대시설부터 라운지까지 풀 패키지로 즐기기에 좋았던, 지금은 없어진 르메르디앙 서울 @르메르디앙 서울 클럽라운지



집과 회사라는 일상에서 살짝 떨어진 호텔에서 즐기는 일탈은 무척 달콤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숨 가빴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 달콤함은 꽤나 중독적이어서, 잠은 비행기에서 자고 내려서는 바로 관광했던 시간빈곤여행자(?) 출신답게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급기야는 주중 퇴근 후-출근 전 시간까지 이용해 호텔을 찾게 되었다. 일탈을 더 자주 즐기려는 의도로 시작된 일상에 호텔 끼워넣기로 인해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부지런한 게으름을 즐기는 법


평일 퇴근길 호캉스는 신나긴 하지만 호텔 부대시설을 전부 즐기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호텔에 머무는 시간 자체도 짧을뿐더러, 퇴근하고 곧장 돌아온 지친 몸으로 호텔 방 안에 들어서면 한 발자국도 꼼짝하기 싫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방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괜찮았다.



객실 안에서 느긋한 휴식을 즐기기에는 목욕이 제격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욕조에 배스밤을 풀고 몸을 담가 물멍 타임을 즐기기도 하고, 객실에서 소소한 티타임을 즐기기도 한다. 거기에 객실에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좋아하는 음악까지 얹으면 그야말로 오롯한 나만의 시간이 완성된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나에게만 집중하고 쉬는 부지런한 게으름을 퇴근 후 호텔방 안에서 마음껏 부려보곤 했다.



집에서는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마는 이 적극적인 휴식활동은, 집을 떠나 호텔에 오면 신기하게도 최우선 순위에 두기가 훨씬 쉬워진다.

일상과 차단된 공간에서 보내는 일상과 같은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휴식이 될 수 있는지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만 있다가 해외여행으로 일탈하던 지난날의 삶의 패턴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깨달음이다.

 




호텔이 취미가 될 수 있을까?


일상을 떠나 즐거움을 찾기 위한 수단으로써 호텔을 찾기 시작했지만, 점점 호텔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커지면서 지금은 호텔 자체가 목적이 되고 취미가 되었다. 처음에 뭣도 모르고 그저 신나는 노래를 막 즐기다가, 그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에 빠져 덕질을 시작하는 것과 비슷한 패턴이려나.



그렇게 몇 년째 1년에 약 35박, 일수로는 70일가량을 주말, 평일 관계없이 호텔에서 보내고 있다. 최대한 다양한 호텔을 경험해보고자 '3년 안에 국내 호텔 100개 여행하기'와 같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자체 미션을 수행하기도 했고, 그 과정을 기록한 호텔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 블로그를 하면서는 나와 비슷하게 호텔 소비 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는 동족들을 여럿 알게 되어 더욱 신나게 덕질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이쯤 되면 호텔 여행을 나의 '취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운영한지 만 3년 반, 햇수로는 5년차에 접어든 나의 호텔여행 블로그 '내일도SUNDAY'



주말, 평일 가릴 것 없이 호텔에 자주 가는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지켜보던 한 지인은 '그럴 거면 너네 집 그냥 세나 줘라. 에어비엔비를 하던가'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호캉스가 아무리 대중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시간 부자도 아닌데 시도 때도 없이 집 놔두고 이 호텔 저 호텔 다니는 게 이상해 보이긴 하나보다.

이런 주변의 시선을 생각하면 내 취미생활을 말함에 있어 조금 움츠러들다가도, 일본 철도 덕후나 파충류 모으기가 취미인 사람들도 있는데 이 정도면 뭐 어떠하랴 내가 좋다는데- 하고 쿨하게 넘기고 있다.




호텔 여행을 다니기 전이나 후나 여전히 시간빈곤자인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일상 만족도는 훨씬 커졌다. 그래서 앞으로도 부족한 시간을 모아모아 돌아다닐 예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호텔에 대한 단상, 호텔에서 보내는 여가와 취미로서의 호텔 등 끄적이고 싶은 이야깃거리를 이곳에 기록해 볼까 한다.





본 글은 2021년 네이버 여행플러스에 연재한 글을 재구성하여 작성하였습니다.(원문)






선데이(타임푸어)

월요일이 싫은 시간빈곤자, 급여생활자, 사무인간.

언제나 내일도 일요일인 것 같은 일상을 위한 호텔 여행을 즐기고 있다.

'3년 안에 국내 호텔 100개 여행하기'에 도전성공.


블로그 내일도SUNDAY

메일 sunday4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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