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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쌤 Dec 25. 2021

삶의 주도권은 아이에게 있다


몇해 전 가을, 5살 둘째의 어린이집에서 주최한 가족 마라톤대회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햇살 좋고 약간은 서늘한 가을 공기가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며칠 전부터 둘째는 마라톤대회를 마치고 가족들에게 줄 메달을 만들어놓았다며 설레어했다. 매주 토요일 있는 첫째의 과학 수업도 빠지고 우리 가족은 마라톤대회에 참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동네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도는 것이 마라톤 코스였는데, 작년 이맘때 어른의 빠른 걸음으로 20분정도 소요되는 이 호수공원을 한 바퀴 산책했을 때, 아이들이 힘들어하던 모습이 떠올라 이번 대회에서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산책하듯 천천히 한 바퀴 도는것에 의의를 두어야지...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회에 참가하였다

집 근처 호수공원...

 그런데 생각지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대회 시작하자마자 둘째가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공원 초입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곧 둘째를 만날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둘째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초조해진 나는 둘째를 만나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도 둘째는 보이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내가 어린이집에서 잠시 마련한 쉼터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의기양양하게 앉아있던 둘째를 잠시 만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시간쯤 쉬고 싶었던 짧은 휴식 시간을 마치고 다시 코스를 달리기 시작한 후에도 역시나 나는 결승선까지 둘째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가느라 코스 내내 전력을 다해 뛰어야 했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아이와 나란히 여유롭게 달리는 아름다운 나의 상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날 마라톤대회는 고등학교 체력장 이후로 오랜만에 숨이 차게 달렸던 날로 기억되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둘째와 나란히 뛰지는 못했다. 잠시 주어지는 쉬는 시간을 포함한 40분가량의 시간 동안 아이의 뒤통수를 보며 따라가기에도 너무나 벅찼다.

빨강색 후드티를 입고 달려나가시는 둘째...

열심히 뛰다가 문득 스쳐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나의 보살핌과 도움 없이는 밥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심지어 산책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서 엄마보다 더 잘하는 것이 생겼다! 적어도 달리기에서만큼은 엄마인 나의 배려나 도움이 없이 온전히 자신의 역량만으로 엄마보다 더 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이제는 엄마가 모든 것을 돌보아 주지 않아도, 엄마보다 잘하는 것이 점점 더 많이 생기겠구나..!" 

법륜스님의 책 '엄마수업'에서는 아이가 만3살이 넘어가면 서서히 독립을 시키고, 그 과정을 거쳐 대학교에 진학할 때쯤 몸도, 마음도 완전히 떠나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이 갔던 대목이고, 내가 너무 아이를 과잉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오르던 구절이기는 했는데, 이렇게나 생생하고 직접적으로 나에게 깨달음을 줄지는, 그것도 5살이 된 둘째를 대상으로할지는 몰랐다. 그날 이후로 아이들이 나보다 잘하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엄마보다 만들기를 잘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첫째, 엄마보다 운동을 잘하는 둘째, 엄마보다 곤충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첫째....


 이제 아이들은 온전히 나의 도움과 양육과 배려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엄마보다 잘하는 무언가를 계속 찾아가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존재인 것 이다. 나보다 잘 하는 것이 생기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아이들은 내가 돌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응원하고 격려하고 지켜봐야 할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변하면 엄마의 역할도 변해야하지 않을까? 아이가 직면한 과제에 우월한 어른으로서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고, 아이를 믿고 격려해줄 수 있는 엄마, 자신만의 영역을 가진 아이를 존중하며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는 엄마, 그런 아이의 독립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며 아이에게 삶의 주도권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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