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명, 무용공(無智名, 無勇功)_마일드경제 칼럼
‘겸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세월 동안 존중받아온 미덕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겸손을 예의 바른 태도나 남을 배려하는 덕목, 즉 도덕적 품성의 영역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겸손은 단지 도덕이 아니라 인간관계나 승부의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을 낮추는 태도는 단지 좋은 인격의 표상을 넘어, 때로는 상대를 제압하는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손자병법』 모공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선전자지승야, 무지명 무용공(善戰者之勝也 無智名 無勇功).” 즉, 진정한 승자는 자신을 지혜롭다며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용감하다고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손자는 겸손을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전략의 형태로 해석했다. 전쟁에서 가장 이상적인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겁먹게 하거나, 더 큰 힘을 가졌음에도 자기를 낮추며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겸손은 바로 그런 전략적 선택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방송사에서 각종 시상식이 열린다. 이때 수상자들의 멘트는 거의 비슷하다.
“이 상은 제가 아니라, 함께한 팀이 만들어 주신 결과입니다.”
“제가 잘해서라기보다, 훌륭한 동료들 덕분입니다.”
“현장에서 고생하신 스태프분들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한결같이 겸손, 곧 ‘무지명 무용공’이다. 그들도 속으로는 “내가 노력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눌러 자신을 낮추고 중심을 잃지 않는 태도, 이것이 바로 전략적 겸손이다.
스포츠에서도 낮춤은 전략이다. 씨름, 스모, 유도 같은 격투기 종목에서 선수들은 경기 전 반드시 자세를 낮춘다. 무게중심을 낮출수록 안정되고, 상대의 힘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심이 높아지는 순간 균형은 무너지고 제압당하기 쉽다. 스모 선수는 거대한 체구에도 허리를 펴지 않고, 씨름 선수도 샅바를 잡으며 몸을 최대한 낮춘다.
골프 역시 마찬가지다. 고개를 들거나 몸을 높이면 스윙 리듬이 깨진다. 무릎을 굽히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 비로소 공을 멀리, 정확히 날릴 수 있다. 이처럼 ‘낮춤’은 자세를 안정시키고 힘을 축적하는 기본자세다. 따라서 겸손은 인간관계의 덕목을 넘어, 각종 스포츠나 경쟁에서 성과를 높이는 출발점이자 승리를 마무리하는 화룡점정이다.
이 원리는 일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부부 사이에서 “나 때문에 이렇게 잘 살게 됐지”라거나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라며 서로의 공을 다투는 일은 흔하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료 간에 공을 다투거나, 상사가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등은 모두 ‘무지명 무용공’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형제간에도, 서로에게 공을 돌리고 세워주는 태도는 겸손의 미덕이다. 결국 많은 문제는 겸손이 결핍되었을 때 생긴다.
손자의 ‘무지명 무용공‘에는 네 가지 정도의 전략적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자기 노출을 최소화하는 방어의 기술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상대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예측 불가능성을 확보한다. 능력의 한계를 알리지 않는 것이다. 눈에 띄지 않고 힘의 한계를 알 수 없을 때 존재감은 커지고, 상대는 두려움을 느낀다.
둘째, 성과를 자랑하지 않음으로써 승리의 지속이 가능하다. 공을 드러내는 순간 내부의 긴장이 풀리고 외부의 견제가 시작된다. 손자는 이를 ‘성공 후의 실패’라 봤다. 장사가 잘되는 가게 주인에게 “요즘 매출이 어떠세요?” 하고 물으면 대개 이렇게 답한다. “그저 그렇죠, 뭐…” 그들은 겸손을 통해 긴장을 유지하고 시기와 질투를 차단하면서 조용히 성공을 이어간다.
셋째, 타인의 신뢰를 얻는 관계의 기술이다. 겸손은 경쟁 상대를 방심시키고, 동료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며, 패자를 감복시킨다. 수상식에서 수상자가 팀과 스태프에게 공을 돌리는 모습은 바로 전략적 겸손의 실천이다. 승자가 승자의 티를 내지 않으면, 패자의 상처와 시기심은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승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조직에서 리더가 자신의 지혜와 공을 직원들의 몫으로 돌릴 때, 신뢰는 자연스럽게 쌓인다. 이때 겸손은 조직의 결속과 감정 밀도를 높이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넷째, 아랫사람으로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직원 입장에서는 모든 상황이 거인의 어깨 위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이때 모든 성과를 자기 몫으로 주장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팀장이나 조직의 공으로 돌리는 것이 현명하다. 명확한 개인성과는 인정받더라도, 보스의 공을 가로채는 일은 위험천만하다. 그것은 자칫 보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고, 존중심이 부족하다는 인상으로 이어져 조직의 질서를 흔드는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성경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모세와 아론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당신들을 위해 이 바위에서 물을 내면 되겠소?”(민수기20:10) 그들이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치자, 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을 자신들의 행위로 둔갑시켰다. 이 불경으로 인해 모세와 아론은 하느님의 분노를 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겸손도 무너지면서 신뢰도 사라진다는 교훈이다.
오늘날 세상은 ‘드러냄의 경쟁’으로 가득하다. SNS에서 자신의 일상을 과시하고, 조직에서는 개인의 성과를 앞 다투어 내세운다. 그 과정에서 남의 공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도 흔하다. 그러나 2,500년 전 손자가 말한 ‘무지명 무용공’의 리더십은 여전히 유효하고 다양하게 적용된다.
결론적으로 겸손은 낮음이나 약함이 아니라, 안정과 밀도 높은 힘이다. 현명한 리더는 함부로 성과를 자랑하거나 자신의 똑똑함을 내세우지 않는다. 자기를 낮추고 공을 아래로 돌림으로써 조직의 신뢰를 쌓고, 결국 더 큰 결과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게 바로 현시대가 요구하는 ‘지속경영’의 열쇠이자 진정한 승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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