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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그림 Aug 16. 2024

5. 그것은, 풍경 2

나의 서울 살이는 2000년 대한항공 객실 여승무원 신입교육이 시작되기 한 달 전 그해 9월부터였다. 마포구 대흥동에 있는 오피스텔 월세로 시작했다. 따로 현관 구분 없이 직사각형 9평 오피스텔이 나의 첫 독립된 공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는 신발장과 옷장이 있고 오른쪽은 화장실, 세면대, 샤워부스가 각각 ㄷ자 모양으로 있었다. 통로를 지나면 정면에 큰 통창이 있고 볕이 잘 드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침대는 창가 쪽에 붙여 두었고 반대편에는 주방시설, 식탁과 냉장고 그리고 세탁기까지 빌트인 되어 있어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다.


이사를 하고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살림살이를 채웠고 신입 교육기간 초반 2주간은 계수 씨와 함께였다. 첫 국내선 현장업무참여비행(OJT, On the Job Training)을 다녀와 긴장한 탓인지 비행기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고 단단히 체해서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쌀쌀한 늦가을 오밤중 계수 씨는 신촌 오거리까지 약국을 찾아 소화제를 사다 주었다. 혼자 있으면 겪어야 하는 일이라며 계수 씨의 걱정은 한가득이었다.


비행 스케줄로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 온전한 나의 공간을 즐길 시간은 한 달에 열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오롯이 나만의 독립 공간이 생겨 무척 기뻤다. 기쁨도 잠시 눈 깜빡하면 계약 만기일이 찾아왔다. 한 차례 계약을 연장하고, 또 한 번 월세를 올려 계약을 다시 하고 2년 후 보증금을 다시 올려야 한다고 하여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보통은 이사를 하겠다고 임대인에게 계약 연장 2~3달 전에 고지를 하고 임차인인 나는 이사할 집을 구하고 가계약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계약만기 일자에 맞춰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20평 남짓 방이 있는 아파트를 계약했다. 


나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의 결과로 아파트 계약금을 모두 날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피스텔 주인이 계약 만기일에 맞춰 다음 임차인이 없으면 보증금을 못 내어줄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집주인과 여러 번 통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급한 마음에 집까지 찾아갔지만 만나 주지도 않았다. 겨우 만나 통사정을 했지만 노력해 보자는 말뿐 통상적인 관행이라며 들어오는 세입자가 없으면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렵다는 본인의 원칙을 고수하여 나의 눈물을 쏙 뺐다. 내 사정을 듣고 성격 급한 외삼촌이 집주인에게 전화하여 담판을 지으셨다. 역시 외삼촌은  '경상도 사나이'였다. 


그리고 아파트 계약을 덜컥한 부동산으로 출동한 외삼촌은, 

“아가 잘 모르고 한 모양인데 좀 도와주이소. 해결해 주이소. 며칠 상간에 괜히 애먹이는 거 아니요. 부탁 좀 하입시더.“ 

통사정을 하셨다. 


그런데 부동산 사장은,

“순리대로 법대로 하시죠”

씨알도 안 먹혔다.


"순리하고 법은 아한테 돈 내주는 거 아이요?"

그러다 이내 외삼촌은 부동산 사장과 대화 중 옥신각신 언성이 높아지셨다.


급기야 사장이, 

“당신 몇 살이야?”


앗! 이게 무슨 일인가? 

이렇게 일이 커지는 걸 바란 건 아닌데...

나는 그만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데, 외삼촌은, 

“찹쌀이다!”

웃참에 실패한 나는 말없이 화장실로 줄행랑쳤다.


강력한 찹쌀 때문에  일은 그럭저럭 잘 해결되었다. 호되게 과외를 받은 셈이었다. 외삼촌 덕분에 나는 그 아파트로 이사해서 4 년을 살았다. 그리고 서울에 살면서 그 후로도 여러 번 이사를 해야 했지만 계약금 사건 이후 사기 한번 당하지 않고 16년은 무사히 지나갔다. 


드디어 2016년 10월 마지막날 나는 마포구에 위치한 한강변의 재건축 아파트에 입주하였다. 강변북로까지 3분 컷인 아파트 위치는 김포 공항과 인천 공항 출퇴근을 하는 나에게 최상의 위치였다. 회사 규정상 유니폼을 입고 출퇴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출근을 할 때도 퇴근을 할 때도 있고 저녁에도 오밤중에도 출퇴근을 할 때가 있었다. 혼자 사는 나는 집을 구할 때 안전한 위치, 공항버스나 공항철도가 가까운 위치의 집을 찾는 것도 중요했다. 그런 기준들도 물론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긴 했다.


찹쌀 아파트 이후 김포 공항 근처 마곡지구 대단지 3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시세보다 5,000만 원이나 싼 아파트 전세였다. 2년 후 1,000만 원의 전세금을 올려주었다. 또 2년 후 올려줘야 하는 전세금이 5,000만 원이었다. 


당시 내가 마련할 수 있는 자금은 5000만 원에 못 미쳤다. 내 집 마련 프로젝트의 시작은 그 5,000만 원이라는 큰돈 때문이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1원까지 끌어 모았다. 돼지저금통 백만 원도 소중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지고 월급을 받은 첫 달부터 모으기 시작한 주택청약 통장, 매달 50만 원씩, 30만 원씩 모아 온 적금 통장도 모두 해지했다. 그리고 나는 보험계약도 모두 해약했다. 전세보증금과 직장인으로 받을 수 있는 대출을 받았고 내 모든 영혼을 끌어 모아 25평 아파트 매매 계약을 했다. 아버지께 이래도 되나 싶어 의논을 했고 마이너스 통장도 만들어 두었다.


아버지를 제외한 내 주변 친인척 지인들 모두 아파트 구입을 반대했다. 일본 경기를 봐라 한국도 버블이 꺼지면 너는 거지 꼴로 길가에 나앉게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업었던 나는 아파트 구입을 강행했다. 강변 북로에 개나리가 만개한 어느 봄날, 스케줄 근무를 하는 나는 5월 휴가를 신청해야 했다. 하지만 비행 스케줄 조정이 쉽지 않았다. 꼼꼼한 부동산 실장님이 날짜조정에 유예 조항을 계약서 특약사항으로 작성해 주셨다. 갑작스럽게 비행 스케줄이 변경되어 부산에 계신 아버지가 대신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러 서울까지 와 주기도 하셨다.


2016년 10월 31일 오전 8시 나는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집 등기를 할 때는 무척이나 떨렸다. 2년마다 이사를 가야 한다거나 월세, 전세 보증금을 올려줘야 하나 걱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비록 온전한 나의 소유는 조그만 화장실 공간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은행 소유였지만 말이다. 집값 상승은 바라지도 않았다. ‘제발 내가 구입한 금액보다 떨어지지만 말아라’를 매일 같이 기도하고 다녔다. 정치, 경제에 어두웠던 나는 그저 시류에 편승해 그렇게 하우스푸어족이 되었다.  


짐 정리를 대충 마치고 창밖으로 해가 넘어가는 잔잔한 한강을 보았다.  국회 의사당은 웅장해 보였고 거대한 돔이 갈라져 열릴 것만 같았다. 강물에 노을 지는 하늘과 밤섬이 맺혔다. 어린 시절 작은 연못 속 하늘도 보였다. 강변북로를 따라 출근을 할 때 차창 너머로 한강을 만끽했다. 비 오기 전 한강 물 비린내 까지도 좋았다. 시야가 트인 창밖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은 모두 그림 같았다. 아름다운 풍경은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서울 살이를 막 시작한 가을보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말이다.


매달 갚아야 하는 엄청난 빚이 생겼지만 더 이상 쫓기는 마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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