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가비와 나는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너무 소중해서 함부로 명명할 수가 없는 게 제일 큰 이유다. 우리 집에 어울리는 이름을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
스위스 치즈 에멘탈의 뚫린 구멍에 각각의 시간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우리 집 모퉁이 통유리창도 듬성듬성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장면은 때때로 나를 자극한다. 창밖은 빛도 소리도 냄새도 분위기도 다채롭다. 등장인물도 시시각각 변한다. 우리 집은 지하 1층과 지상 4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에는 트렌디한 브런치 가게, 2,3층의 총 4세대에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사회 초년생 직장인, 달달한 신혼부부, 혼자되신 할머니가 살고 계시고 4층 꼭대기에 우리 부부가 거주 중이다. 사는 모양이 각각인 우리가 한집에 모여 살고 있다. 마치 커다란 비행기 아래쪽 belly에는 각종 화물이 탑재되고 1층 혹은 2층에는 first, prestige, economy class 승객들이 탑승하고 그리고 운항, 객실 승무원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지만 비행기가 이륙해서 착륙할 때까지 운명 공동체인 것처럼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집을 짓기로 결정하고 연희동으로 동네를 정했다. 얼마나 많은 집들을 봤는지 모른다. 어렵사리 계약금을 마련했고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의욕과 열정은 가득했지만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계획 자체를 세우기도 어려웠다. 결국 우리 둘은 건축경험이 있는 아버지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신 덕분에 용가비와 나는 큰 스케치는 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를 했다. 이제 이 스케치를 어떻게 예쁜 그림으로 만들 것인가는 우리 둘의 몫이었다.
우리가 맨 처음으로 한 일은 설계사무소를 찾아간 것이었다. 주변 지인들의 추천을 받아 6곳의 설계사무소를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상담 후 우리 둘은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일단 우리가 지금까지 해 보았던 일과는 다른 엄청난 규모의 자금과 지식이 필요했다. 예산은 정해져 있었고 하고 싶고 만들고 싶은 것은 많았다. 매일매일 내려야 할 결정이 산더미 같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우리 둘은 참 많이도 다퉜다. 집의 외관을 정하기 까지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처음에 나는 모던하며 단순한 디자인의 건축물을 원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니멀한 디자인을 구현하는 것이 건축비가 가장 많이 든다고 하였다. 현실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선책과 차선책을 찾으며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가야 했다. 용가비는 집 주변 환경을 고려했을 때 하얀색 외관이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의 집에 가까울 것 같다고 했고, 나는 그 말에 설득되었다. 수십 번의 상담과 고민 끝에 우리와 잘 맞는 건축 설계사를 만났다. 집을 짓는 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리가 결정을 못해 헤매고 있을 때 소장님이 진심 어린 조언도 해 주셨다. 설계사무소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멋진 집 설계도면이 나왔다.
기쁨도 잠시, 다음은 이 설계 도면을 현실로 구현시켜 줄 건설사를 정해야 했다. 너무 어려웠다.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았다. 제일 큰 문제는 자금이었다. 그리고 건설사의 규모, 실력, 이력까지 여러 면을 고려하다 보니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고 우리 둘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두 번의 실패 끝에 현재 우리 집을 지어준 건설사를 만날 수 있었다. 계획보다 건설비가 많이 지출되었지만 최선의 선택이었다.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지금, 용가비와 나는 참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2021년 1월 4일 본격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땅을 파고 다지기를 시작했다. 몇 달간의 기초공사 기간은 지루했다. 그날이 그날이던 어느 날 물속에서 삐죽 머리를 드러내듯이 지상으로 뼈대들이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뼈대를 세우고 벽을 치고 1층, 2층 차근차근 공간이 분리되었다. 내부 인테리어를 하기 시작하니 문이 생기고 조명도 들어왔다. 어느덧 지붕을 얹고 집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완성된 집에 입주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집의 준공이 계속 미뤄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살고 있던 아파트는 전세를 주고, 인천공항 근처 오피스텔에 1년 계약을 해 생활하고 있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서 한 달만, 한 달만 더 살아도 되냐고 사정하는 중이었다. 야속하게도 담당 공무원은 깐깐하기 그지없었다. 설계사무소 소장님도 건설사 현장소장님도 저마다의 사정으로 얼굴을 붉히기를 두어 번 그 후로도 지루하고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준공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이사날짜를 임의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업체 예약을 당장하고 확정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말이다. 정 안되면 건물 외부에 이삿짐을 쌓아두고 며칠을 근처 찜질방에서 잘 생각도 했다. 그런데 기적같이 이사전날 준공검사가 통과되었다. 이렇게 어렵사리 2021년 10월 15일 드디어 우리는 새 집에 입주할 수 있었다.
집이 완성되고 6개월 남짓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전담 부동산 실장님이 MBC 프로그램에서 섭외요청이 왔다고 알려주시며 촬영가능 여부를 물어왔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지인들로부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혹시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성 들여 지은 집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고 조심스러웠다. 용가비와 나는 출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오케이를 했다. 덕팀의 김숙과 폴킴 출연진들은 해당 집에서 몇 시간 촬영을 하고 철수했다. 어떻게 촬영했을까 궁금했지만 나는 얌전히 방영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2022년 5월 29일 MBC 구해줘 홈즈 158회 서울편 <새 출발을 시작하는 1인 가구의 집 찾기!>에 이름 없는 우리 집 201호가 출현하게 되었다. 나는 방영 시간에 맞춰 TV를 틀었다. 창업을 꿈꾸는 1인 가구,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며 20대를 보낸 의뢰인이 그동안 꿈꿔 왔던 '베이커리 창업'을 위해 홈즈에 의뢰를 한 거였다. 베이킹 연습도 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는 집을 찾는다고 했다. 네 번째 집까지 소개되고 삼십 분쯤 지났을까, 계수 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언제 나오노? 나오긴 하나?" 나도 답답했다. 이대로 안 나오는 건 아닐까, 반쯤 포기하던 찰나 우리 집이 소개되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베이킹받는 집'이란 이름이었다.
-출처 m.imbc.com
TV에 나온 우리 집을 보자 감격스러웠다. 한편으로 맘 졸이고 힘들었던 일이 생각나서 그런지 덤덤한 기분도 들었다. 방송용 카메라에 담긴 집은 생각보다 커 보였고, 집에 대한 패널들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비슷하게 느껴져 신기하기도 했다. 드론 카메라가 옥상을 비추자 뱀처럼 시커먼 호스가 널브러진 모습이 보였다. 용가비가 화분에 물을 준 후 정리하지 않은 호스였다. 방송을 본 용가비의 부끄러움과 별개로, 의뢰인은 우리 집을 선택했다. 홍제천, 안산 도시 자연공원 도보 1분, 대단지 아파트 인프라, 신촌역 대중교통 15분, 채광이 좋은 집이라는 평가와 함께였다. 역시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고, 나는 TV 앞에서 기다린 시간을 위무했다.
용가비와 나는 3년째 고민 중이다. 몇 가지 후보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모두 사라졌다. 이를테면 'ㅇㅇ옥', 'ㅇㅇ재', 'ㅇㅇ 아틀리에' 같은 이름들. 그러나 이름이 없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름이 없는 상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니까. 용가비와 내가 새롭게 매일매일을 맞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집에서 쌓아나가는 시간 속에서 언젠가는 이름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 주지 않을까 나는 그런 기대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