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탓하는 사람이 재택글쓰기 가능할까?
글만 쓰는 작업실을 갖고 싶었던 적 있는가? 내가 기억하기로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원했고 여전히 못 가졌다.
어렸을 때 미녀와 야수를 보고 서재라는 공간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찻잔이 말을 하고 빗자루가 스스로 일을 하는데 책도 많은 집이라서 내 환상을 키워줬다. 야수는 성질내느라 바쁘니까 서재 좀 빌려주면 좋겠는데. 그때는 돈을 많이 벌어서 저런 서재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더 단출한 공간을 좋아하게 되어서 창문 있는 공간에 1600 원목 책상만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색깔은 월넛 정도로 하면 두고두고 마음에 들 것 같다.
글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을 꾸준히 원했지만 이 공간이 심미적 요소만 채워주는 게 아니라 효율성도 높여준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은 1인실 스터디카페에 발을 딛고 나서다. 논문 분석 때문에 가끔 키보드를 사용해야 된다고 하니까 방문까지 있는 1인실을 사용하라고 하셨다. 1인실 파란색 문에는 밖이 보이는 작은 직사각형 창문도 있었다. 문을 닫고 들어가면 적당한 조도와 창문이 있어 긴장감도 있어서 프로 학생처럼 집중할 수 있었다. 도서관 노트북존에서 히터와 함께 졸음 공부하던 시절이 시간낭비로 느껴졌다. -그 뒤에 이사 가선 문 대신 커튼으로 닫는 스터디카페 1인실을 사용했는데 문에 창문도 없고 그 정도 집중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그동안 집중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집중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는 것으로 입장정리됐다. 그 당시 내 공부방은 침대방 옆에 있는 작은 방이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비하면 꽤 괜찮은 공부환경이었다. 새벽에는 집에서 공부가 잘 되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쉽지 않았다.
이사 온 지도 3년이 넘었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 꽤 적응해서 예전 생각은 잘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원고를 쓰다가 너무 안 써져서 다시 공간 탓을 하게 돘다. 한동안 집에서는 글을 못 쓸 것 같아서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들고 노트북 사용가능한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에 가긴 갔는데 거기서 써온 글들이 제대로 쓸 수 있는 게 없었다. 형편없는 글이 나와서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생각했더니 어느 정도 글 쓸 정도로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들어왔다. 이때까지 내가 써서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 글은 문을 닫고 혼자 있는 공간에서 썼다. 그리고 특히 새벽에 써서 확실히 아무도 없다는 걸 모든 감각이 느끼고 있을 시간이었다. 내가 갔던 도서관은 어땠냐면 이용자가 별로 없어서 테이블에는 항상 나 혼자 있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 편한 곳이었지만 공간에 나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없는 곳이었다. 에어팟을 사용해도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카페보다 훨씬 괜찮은 환경이었는데 이미 1인실 스터디카페를 경험하고 난 뒤에는 이것도 불평의 요소가 된다.
공간을 탓해도 되는지 몰랐는데 얼마 전 읽은 몰입 책에서 몰입은 혼자 있는 공간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룸메이트가 1명이라도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긴장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딱 내가 주장해 오던 바다.
그럼 지금은 어디서 글을 쓰냐면 이상과 현실을 절충했다. 원래는 침대 바로 옆에서는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깼다. 지금은 침대 45도에 위치한 책상에서 쓰고 있다. 인간의 존재보다 침대의 존재가 덜 방해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게 가능한 건 9월부터 눈 뜨자마자 이불 개기를 하고 나서 자는 시간 말고는 침대에 안 가게 된 점이 크고 이제 안 사실인데 책상에 책을 쌓아두니까 시야에 침대가 안 들어온다. 이불 개기만큼 적재효과를 보고 있다. 그리고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들고 도서관까지 가는 게 힘들기도 하고 독서대 없으면 타자칠 때 목이 아파서 이렇게 됐다. 문제라면 도서관에서는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시간이 남으면 미룬 일처리도 했는데 집에서는 글만 쓰고 잊게 된다. 집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목록에 있지 않은 할 일은 잊고 유튜브로 가기 쉽다. 그래서 또 생긴 습관은 매주 일요일에 다음 주 쓸 글 가제를 요일별로 적는다. 그러면 적어도 적어둔 글은 쓴다.
이번주부터는 원고수정 기간인데이번에는 침대 옆 책상에서 책을 빚을 수 있을까? 고등학생부터는 침대 옆 책상에서 뭘 해본 적이 없어서 이것도 도전이다. 여전히 작업실의 꿈은 가지고 있겠지만 여기에도 만족하게 될 것 같다. 집에서는 절대 생산적인 일을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까 동선도 간편하고 재택글쓰기 장점도 확실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배고플 때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책상을 치워야겠다고 며칠째 생각했는데, 이 쌓여있는 책이 책상 밖에 시야를 차단해서 월요글쓰기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치울 이유가 사라졌으니 오늘은 이만하고 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