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블리쌤 Nov 07. 2024

교수 vs 교사, 나의 선택은?

대학 지도교수님이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셔서 대학 졸업할 때 내게 유학 가서 공부를 더 할 것을 권하셨다.

그래서인지 임용 합격 후 일반대학원과 교육대학원 선택 고민에 교사가 되어 3년이 지나면 권태기가 올 것이라고, 일반대학원 가서 유학 갈 준비를 하라고 권하셨다.

대학 때부터 과외 알바를 하면서 집안에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었던 장남으로서의 가족 부양과 집안 형편을 얘기하니, 공부하려면 다소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진정 나의 미래를 생각해 주시는 진심이 담긴 조언이자 격려여서 감사한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러고 대학 졸업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결혼을 하고 나니 교수님은 공부하라니까 결혼해서 눌러 앉았다고 동기들에게 아쉬움을 나타내셨다고 한다.

말 그대로 settle down이었던 셈이다.


그 후로 27년간 나는 여전히 교사로 머물러 있다.


이번 주 동아리 시간에 교장, 교감쌤 허락을 구하고 모 대학교 사범대 학생 7명을 초대해서 수업활동을 진행했다.

대학원 석사과정 동기가 교수로 재직하는 교육대학원과 사범대학에 현직교사 특강을 했었고, 마침 우리 학교와 인근이어서 교생실습으로 신기한 인연이 닿아 친구 교수와 학과장 교수님도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 방문하셨다.


교장쌤께 인사를 드리면서, 석사과정 동기라고 하니까,  교장쌤께서 나를 보시며 "부장님은 뭐 하셨어요?" 이렇게 말씀하셔서 모두가 웃었다. 학과장 교수님은 이 학교에 근무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나의 무안함을 살피셨다.

따지듯 비판적인 어조도 아니었고, 애초에 내가 원했는데도 교수를 못하고 교사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으니 전혀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웃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런 말씀을 충분히 하실만했다.


교육특구 고등학교나 외고나 과학고의 교사라고 하면 일반 학교보다 교사 수준이 높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경향을 생각하면, 교수가 교사보다 사회적 인식이 더 높다는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석사 할 때 한 교수님은 내게 교사보다 교수를 하라고 박사과정을 권하시며, 그러면 평생 목에 힘주고 다닐 수 있다고도 하셨다. 그 안에 교수로서의 자부심이 녹아들어 있었다.

진정 그것이 교수가 되려는 목적이라면 더 고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지만, 혹 깊은 연구의 숭고한 목적과 열정이 있었더라도 학생들과 좀 더 친밀한 교감을 이루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중등학교 교사가 되려는 소원 같은 갈망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실은 석사과정을 겪으면서 학문을 위한 학문에 지쳐갔었다. 교사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더 극명하게 비교되고 대조되었던 것 같다. 나의 관심사는 학생들에게 전달되지 못할 학문의 깊이가 아니라 아이들이 관심과 흥미를 가질만한 컨텐츠 수집과 구성이었다.


내게는 연봉도 사회적 지위나 인식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각들이 아이들을 만나서 뭔가를 가르쳐 주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열망의 방해가 될 것 같아 아예 외면해버렸다.

그런 마음의 소원을 일상으로 이루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왔으니, 장학사, 교장, 교감 등의 삶이 부러울 리가 없었다. 수업을 안 하게 되면 내가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것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재고 교사나 수석교사를 권유받을 때도 수업시수가 적다는 이유로 더 자세히 고민하려 하지도 않았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수업이 더 힘들어지고 아이들이 좋아해 줄지에 대한 걱정도 외면했다.


그런 내게 교사 외에 그 어떤 가정법적인 유혹도, 권태기를 몇 번이나 지났을 법한 교직경력의 축적도 나를 흔들지 못했다. 물론 민원과 여러 가지 힘겨운 일들로 무력해지고 우울해지고 불안해진 경험도 있긴 했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교사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교사인 내게 언젠가 대학 강단에 설 거라고 믿는다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영어 전공자가 영어권 유학 학위가 최소 조건임을 굳이 설명드리지 않았다.

교장으로 퇴직하신 두 분의 외삼촌도 내게 평교사로 머물지 말기를 당부하시기도 했다.


심지어 교사 신분으로 휴직하고 구청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하던 시절, 교사 출신의 5급 과장님이 자신처럼 5급 공무원 시험을 응시하라는 강력한 권유도 하셨다. 

교권이 추락하기 전의 일이었는데 지금의 교사 현실을 생각하면 옳은 조언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나 사회적인 지위 등의 그 어떤 설득에도 난 우직하리만큼 내 자리를 지켰다.


교사에 대한 선호도가 올라간 것은 IMF로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하게 된 이후였다. 물론 최근 교권 추락으로 인해 다시 교직에 대한 인기가 급감하고 있지만...

그러니 내가 교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그런 선호도의 영향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때부터 키웠던 교사의 꿈을 응원받은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90년대 교권 추락을 상상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음에도 부모님도 학교 선생님들도 남자는 더 큰 뜻을 품어야 한다며 교사의 길을 극구 말리셨다.

그럼에도 고3 때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바라셨던 서울대 법대 성적에 미치지 못했던 상황에서 그래도 서울대라는 이름값에 기댄 수긍이었다.

재수해서 경북대 영어교육과를 지원하는 걸 부모님이 말리지 않으신 건, 경북대 문과에서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던 학과라고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서울대 영어교육과 합격할 정도의 성적이어서 부모님의 아쉬움은 더 컸다. 소위 더 높은 대학의 더 높은 학과를 지원했다면 교사가 아닐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성적이 아까워서라도 의대를 가야 하는가? 결국 입결이 높다는 것은 취업, 연봉, 지위 등도 높아질 가능성도 크다는 의미이긴 한데..


교육특구의 여고생들은 나의 입시 과정 얘기를 하면 나를 루저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소위 학벌로도 직업으로도 그들이 생각하는 성공의 범주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진심 어린 위로로 자신들의 속상함을 전했던 것이었다. 그 이상의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소심함으로든 의도적인 선택으로든 결국에는 이르지 못한 실패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면 그 위로와 힐링의 마음만 받고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를 향한 그 불쌍한 눈빛을 거둬달라고. 난 지금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그때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을 아내와 딸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여러분들로 인해...

부러움이나 시기나 질투도 나를 침범하지 못한다고. 그저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재수하면서 서울대를 선택했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나의 삶은 아내와 딸들은 물론 이제까지 만나왔던 학생들을 생각하면 부러움이 아닌 악몽으로까지 느껴지는 것은, 이후 주어진 모든 만남에 진심을 다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라고.



부디 나처럼 자신만의 행복한 길을 찾아서, 선택이 옳았음을 삶으로 증명해가기를 기대하고 응원한다고...

작가의 이전글 2025학년도 수능 수험생 유의사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