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사실은 손해 보는 게 싫다.
키가 작다. 볼살이 많다. 이목구비가 동글동글하다. 만만해 보이는 특징을 모조리 섭렵한 채 살아간다는 것, 쉽지 않다.
내 첫인상에 무조건 들어가는 문장은 ‘수줍음이 많아 보인다’이다. 나도 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외형과 목소리는 분명 수줍은 이의 전형이다. 누군가는 장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원치 않는 이에게는 저주다.
어느 정도냐 하면, 길거리의 사이비 전도사들은 저 멀리서부터 사람들을 헤치고 내게로 직진한다.
그 외에도 지금 썼다 지운 수만 가지 일화들이 있지만 그게 쟁점이 아니니 일단 삼키겠다.
요즈음 <손해 보기 싫어서>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손해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주인공인데, 이름처럼 손해 보는 걸 가장 싫어한다. 이 드라마를 끝까지 봐야겠다 마음먹은 장면이 있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 체육 시간에 왜 남자아이들은 운동장을 넓게 쓰도록 축구를 시키고 여자아이들은 협소한 장소에서 피구만 시키냐고 따지는 장면. 나도 똑같은 생각을 어린 시절 했던 적이 있다. 심지어 다들 피구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들 피구를 시킨 건지. 축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여자중학교에 입학하고서야 주어졌다. 남자아이들은 유치원에서부터 했던 축구를 열넷이 넘어서야 처음 해본 거다. 하고 싶으면 그냥 했으면 되는 거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자가 축구를 한다는 건 그 당시 여자아이에게는 사회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축구를 해보고 싶어 했던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모두가 비웃었다. 부끄럽게도 거기에 나 역시 포함된다. 드라마 속 어린 손해영의 대사를 보고서야 나도 사실은 부끄럼 없이 땀에 흠뻑 젖어 뛰어놀던 남자아이들을 부러워했음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따지고 싶었던 일들이 많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항상 27-28번의 번호를 받았다. 항상 1번은 남자아이였고 남자아이들의 번호가 끝난 후에야 여자 1번이 번호를 부여받았다. 왜 굳이 그런 사소한 일에까지 차등을 두어야 하는 거지? 그러나 불만을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은 없다.
설날 아침,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는데 나보다 어린 남자 사촌들은 만원씩 받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사촌 언니들도 오천 원씩 받는데 쟤네는 뭔데 만원씩이나 받지? 집으로 가는 길에 볼멘소리를 했다가 괜히 혼이 났다.
안 그래도 손해 보기 쉬운 세상, 만만한 얼굴로 태어나기까지 했으니 손해 보는 건 일상이다. 가장 정신건강을 지키는 방법은 무뎌지는 것. 경험하지 못해 본 이들에게 내 이야기는 피해망상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니 가벼운 손해는 대충 넘기고 주변에까지 피해가 미칠 만한 일에만 대응한다. 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은 ‘그럴 수도 있지 뭐’, ‘ 어쩔 수 없지 뭐’. 매일매일 화내는 대신 나는 무던한 성격을 가졌다고 스스로 세뇌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나도 사실은 시비 터는 인간들에게 화내고 싶었다. 내 배려를 당연히 여기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하는, 당연히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는, 내 경험을 피해망상이라 격하시키는 모든 이들에게 따지고 싶었다.
나는 사실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다. 손해 보는 게 사실은 너무 싫다.
그러나 내일이면 다시 무던한 어른처럼 보여야 하니, 드라마 속 손해영을 보며 대충 위로를 받는다. 자기 전에 다시 한번 되뇐다. 그럴 수도 있지, 어쩔 수 없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