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양성평등 글짓기 대회에 ‘역차별’을 소재로 글을 써 내 상을 탄 적이 있다. 당시 역차별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이유는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 여성인권 이야기만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 역차별 이야기가 따라 나오곤 했으니 사춘기도 오지 않은 어린이가 그대로 흡수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역차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차별의 또 다른 이름과도 같다. ‘역’ 차별이란 이름에 걸맞게 사실 차별이 있어야 살아 있을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역차별이 존재한다는 건 차별이 여전히 잔존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차별은 그대로 둔 채 역차별만 없애기 위해 하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차별을 없애면 역차별은 자연스레 사라지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이라는 영화의 내용을 예로 들어 보겠다. 영화의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미국 법전의 성차별적 조항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 변호사에 대한 영화인데, 이 변호사가 이용하는 사례가 독특하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법정 보육자는 여성만이 인정되었다. 이 때문에 미혼 남성은 보육자로 인정받지 못해 한 남성이 직장도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정부로부터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주인공인 긴즈버그 변호사가 이 상황을 이용해 미국 법전의 ‘성차별’적 요소를 지적하고자 하는 게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영화 속 사례의 남성은 역차별의 피해자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이 역차별은 가부장제 속 여성과 남성의 고착화된 역할 분담으로 인해 발생된 모순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애초에 왜 여성만이 보육자로 인정받았을까? 기혼 남성은 왜 사별했거나 이혼했을 경우에만 정부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이를 키우는 것, 시부모를 돌보는 것 모두 여성의 역할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차별이 사라지면 역차별은 자연스레 없는 사실이 된다. 역차별을 없애고자 하는 노력이 사실은 무의미하다는 걸 언제쯤 모두가 알게 될까? 역차별을 반대하는 이들은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언제쯤 알게 될까? 차별은 없는 존재로 취급하면서 역차별에만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자신의 모순을 도대체 언제쯤 깨닫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