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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gineer Feb 04. 2022

17화 대니의 죽음, 토론토대학교
공대 일 학년

어머니를 모시고 외출에서 돌아온 대니의 아파트 문에 흰 봉투가 붙어 있었다. 봉투에 인쇄된 이름으로 패밀리 닥터한테서 온 편지임을 알 수 있었다. 빨리 토론토 제네럴 하스피털로 오라는 짧은 내용이었는데 전화 통화가 되지 않자 닥터가 사람을 보내면서 까지 알린 급한 멧시지였다. 지난주 코피가 멈추지 않아 응급실을 갔었는데 치료 후에 코피는 멈추었지만 혈액 검사를 해서 결과는 패밀리 닥터한테 보낼 것이다 라는 얘기가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대니는 입원실로 안내되었고 한 시간 후에 패밀리 닥터가 도착했다. 수년 동안 대니의 가족을 친근하게 보살펴 준 닥터 윤의 표정은 평상시와는 달리 밝지 않았다.  혈액 검사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대니는 급성 백혈병을(1) 앓고 있었고 대니의 몸에 있는 푸른 멍 자욱들은 부딪쳐서 생긴 멍이 아니고 급성 백혈병의 증상이라고 닥터 윤이 암울하게 말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대니는 사망했다.  옆에서 대니의 임종을 지켜본 리나는 그의 임종을 담담하게 전했다. 평소와 같이 운동삼아 이리저리 걷던 내니가 숨이 차다며 침대에 누우려는데 다리가 안 올라간다며 허둥거리다가 간신히 누웠는데 어느 순간에 대니가 깊은 숨을 한번 들이쉬더니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며 그 숨이 마지막이었다고…


급작스런 대니의 죽음은 나와 유라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밝고 유쾌했던 대니가 우리 곁을 갑자기 떠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급하게 마련된 장례식에서 이미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더 이상 울지도 못하는 리나는 장승처럼 서 있기만 했다. 조이는 유라의 손을 꼭 잡은 채 내내 흐느끼기만 했다. 막내아들을 잃으신 대니 어머니는 장지로 떠나는 대니의 관을 붙든 손을 놓지 못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장례식이었지만 나는 울 수가 없었다. 그들의 슬픔 앞에서 나는 감히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훌리지 못한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유라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갑자기 슬픔이 몰려왔다. 온태리오 호수가 눈앞에 있었다. 차를 세우고 호숫가로 뛰어갔다. 자갈을 한 움큼 쥐고 호수에 던지기 시작했다. 점점 숨이 차 왔다.. 그렇게 수십여 개의 돌을 던지고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유라가 뒤에서 나를 꼭 껴안았다. 며칠 후 대니가 꿈에 나타났다.  그가 입술을 움직이며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느낌으로 난 괜찮아하는 것 같았다. 그 꿈을 마지막으로 대니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9월 첫 번째 화요일 토론토 공대 학기가 시작됐다. 1학년 때에는 전공에 관계없이 다른 과 학생들과 함께 모여 수업을 받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중국 유학생들이 상당수 있었고 캐네디언-차이니스 학생들과 수를 합치면 반에서 약 25%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그룹을 형성해 대부분 맨 앞 두어 줄에 모여 앉자 수업을 듣는다. 백인 아이들은 같은 고등학교 출신들끼리 모여 그룹을 이루고 나같이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하는 학생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학교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조금씩 친숙해지면서 우리만의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인도네시아 유학생, 캐나디안-인도인 , 그리스 유학생 등등 들과 그룹을 이루어 나름대로 재미있는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유학생, 바크리는 일본 유학 시 만난 일본인 여자와 결혼해 아기까지 가진 친구였다. 낮에는 학교 저녁과 주말에는 알바까지 하면서 열심히 사는 아주 모범적인 친구였다. 그리스 유학생 조지는 수줍음을 타는 친구였는데 그런 소심함 때문에 백인 친구들보다 우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우리와 그룹이 되었다. 그외 한두 명 더 우리와 함께 했는데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파티 좋아하고 시끄러운 친구들 대신 상대적으로 덜 요란한 우리들과 어울리긴 원했다. 


토론토 공대 일 학년 일 학기 수업은 대부분 고교 13학년 때(2) 배운 수업 내용들과 비슷해서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수업은 주로 수학과 과학 중심이었고 수준도 유사했다. 모든 교수님들은 13학년 수업을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은 이번 가을(9월~12월) 학기에 좋은 성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너희들이 마지막으로 받을 수 있는 괜찮은 성적일 것이다.라는 의미 심상한 말씀들을 하셨는데 겨울-봄(1월~4월) 학기가 되자 바로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가을 학기가 끝날 시 나의 수학 성적은 모두 90점대 였지만 그것을 끝으로 나의 성적은 점점 아래로 향했다. 2주의 짧은 크리스마스-연말 방학이 끝나고 겨울-봄 학기가 시작되자 수업 내용이 급격하게 어려워졌다. 교수님들은 수업 내용은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들어도 고작 6,70% 밖에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수업 내용에 등장하는 생소한 전문 용어들과 진도도 너무 빨라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자구책으로 소형 녹음기를 구입해 수업 내용을 모두 녹음하고 다시 반복해서 들어야 그나마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영어에 어려움을 가진 나와 바크리는 우리 그룹의 캐나다 태생 소심한 친구들 덕분에 무사히 진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 4월 말경에 일 학년 모든 수업 과정이 끝나고 5월 초부터는 약 3주간 연말 고사가 치러졌다. 일주일에 1, 2개의 시험이 있었고 시험 시간은 과목당 2~3시간이었다. 시험은 대부분 오픈북(교과서 참고 가능) 또는 cheat sheet(각자 종이 한 장에 수업 내용을 정리해 시험에 들고 들어감: 깨알같이 작은 글자로 가능한 중요 내용을 모두 적음) 포맷이었다. 시험지는 2,3 페이지로 페이지마다 한 문제가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그 내용을 파악하고 풀어야 하는데 문제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시험의 핵심이었다. 때로는 생소한 단어들이 눈에 띄어 어쩔 줄 몰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난 손을 들어 시험관(대부분 조교들)한테 묻곤 했다. 조교들의 상당수가 유학생들이라 도움을 주는데 인색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5월 말에 모든 시험이 끝나고 3개월의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나의 성적은 하락했지만 모든 과목을 패스했다. 9월 초 2학년 학기가 시작했을 때 약 40%의 학생이 낙제를 해 학교에서 퇴출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 그룹에서는 낙오자가 한 명도 없었다.


(1) 급성 백혈병 : Acute leukemia, 이 병은 증상이 전혀 없는 경우가 많아 조기 진단이 어렵다 한다. 현재도 완치는 어렵고 5년 정도 살 수 있는데 나이에 따라 치사율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20세 미만은 68%, 20세 이상은 26%로 급격히 감소한다.

(2) 13학년 : 1921~1988년까지 시행했다. 1993년에 OAC(Ontario Academic Credit)이라는 명칭으로 다시 시행되다 2003년에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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