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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gineer May 17. 2022

한국, 캐나다 원자력 발전소 이야기

캐나다 - 한국 원전, 소소한 이야기들

지구 상에 현존하는 원자력 발전소의(원전) 숫자는 2020년 기준 440개로 전 세계 전체 전력 공급의 10%를 생산하고 있다. 원전은 크게 미국형과 캐나다형의 2종류로 구분된다. 경수로라 불리는 미국형 원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H2O,경수)을 냉각수로 사용하고 있고 중수로(추후 캔두(CANDU)로 공식 명칭 부여)라 불리는 캐나다형 원전은 중수(H3O, 물에 H[수소]가 하나 더 붙어 있는 물이며 H2O보다 무거워 중수라 명칭)를 사용한다. 원자력 발전은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도록 조건을 만들어 주고, 이때 발생한 열에너지로 냉각수를 증기로 변환해 터빈을 돌리면 전기가 생산되는 원리이다. 핵분열은 핵연료로 사용되는 우라늄의 동위원소인 우라늄-235에서 주로 일어난다. 총 440개의 원전 중에 406개가 경수로, 34개가 캔두다. 경수로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나  캔두는 캐나다, 한국, 인도, 중국, 아르헨티나, 루마니아에서만 운영되어 있다. 한국에는 21개의 경수로와 3개의 캔두가(1개는 영구 폐쇄) 운영되고 있다.  


캔두 원자로                                                                           미국형 경수로 원자로

원전은 1945년 핵폭탄 한방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개발되었고 상용화된 미국형 원전은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미국이 개발한 원전은 건물 크기의 타원형 철제용기(원자로)가 핵심인데 캐나다는 당시 이런 규모의 철제 용기를 제작할 수 있는 산업 시설이 없었다.  캐나다 국내 사정에 맞는 원자로 설계가 필요했고 수백여 개 파이프를 엮어 만든 새로운 형태의 원자로가 개발되었다. 즉 파이프 하나하나가 작은 원자로 인 셈이고 모두 합쳐 미국형 원자로와 유사한 용량의 전력 생산이 가능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편리한 점은 미국형 원자로는 농축 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해야 하나 캐나다 원자로는 농축이 필요 없는 자연산 우라늄을 사용할 수 있어 값비싼 우라늄 농축 시설이 불필요했다. 특수 산업시설과 비싼 농축시설이 필요치 않은 이점 때문에 캐나다형 원전은 대부분 개발 도상국들에게 수출되었다. 한국의 경우는 조금 달라 1978년도에 준공된 미국형 원전인 고리 1호기가 운영 중이었으나 안정적인 전력 공급에 대비해(하나의 특정 기술 의전도에서 탈피해 2개의 다른 종류의 기술 보유로 안정적인 전력 공급 가능케 하자는 정부 정책) 캔두를 도입하게 되었다. 1983년에 월성 1호기가 완공되었고 1997,8,9년도에 2,3,4호기가 완공 되었다. 한국의 월성 후속기들이 성공적으로 전력 생산을 시작하자 중국에서도  2개의 캔두를 도입했다. 한국 정부의 정책이 한국과 중국에 지속적으로 5개의 원전을 수출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캐나다는 10여 년간 원전 수출의 황금기를 누렸다.  이 두 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캐나다 원전 사업은 하양 길을 걷기 시작했고 원전 사업의 주체였던 AECL(Atomic Energy Canada Limited: 캐나다 원자력 공사)는 2011년에 엔지니어링 사업 부서를 푼돈 15M에 몬트리올에 본사를 둔 SNC-Lavalin 그룹에 매각되었다. 그러나 11년이 지난 지금까지 SNC-Lavalin사는 신규 원전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2011년도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급격하게 나빠진 여론과 국민 눈치에 민감한 정치인들이 원전 거론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캐나다 원전 개발의 시초는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1940년 4월에 노르웨이를 침공했고 두 달 만에 노르웨이는 완전히 점령당했다. 침공의 목적은 노르웨이에 독일 해군 기지를 설립해 북해에서 영국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는 러시아 태생 핵물리학자 루 코와스키와 오스트리아 태생 한스 할본이 노르웨이에서 공급받은 중수를 이용해 새로운 원자로를 연구하고 있었다. 중수는 핵물리학에서 아주 귀한 연구 재료였고 노르웨이에서 공급한 중수는 당시 유럽에 존재하는 중수의 전체 물량이었다. 그들의 연구는 전쟁이 한창였던 상황에 비춰 아주 중요한 과제였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핵폭탄 개발을 비밀리에 연구하고 있었고 이는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였다. 핵폭탄 제조에는 플루토니움이 필요했고 플루토니움 생산은 우라늄 농축 시설이 있어야 가능했다. 하지만 루 코와스키는 농축 우라늄이 필요치 않은 중수 원자로도 플루토니움 생산이 가능한 것을 발견했고 중수 원자로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노르웨이가 함락당하고 프랑스도 위험에 처하자 두 학자는 중수를 가지고 영국으로 망명해 영국 학자들과 연구를 지속해 나갔다. 그들이 떠난 지 두여달만에 프랑스도 독일에 점령당하고 1942년 독일이 영국 땅까지 위협하자 학자들은 미국 망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은 안전 문제를 빌미로 그들의 망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를 알게 된 캐나다 정부가 루 코와스키와 영국 학자들의 망명을 받아들였고 몬트리올 대학에서 연구를 재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 잠수함이 북대서양을 건너와 세인트 로렌스 강(*)을 통해 온태리오의 킹스톤 근교까지 침투했고 미국과 전투를 벌이다 독일 잠수함은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전쟁은 먼바다와 유럽에나 있는 일이라고 안심하고 있던 캐나다를 온통 전쟁 공포로 떨게 만들었다. 극도의 위험을 느낀 캐나다 정부는 오타와에서 서쪽으로 수백 킬로 떨어진 알공퀸 원시림 지역 북쪽의 작은 오지 마을 초크리버에 새로운 연구소를 설립하고 모든 핵 연구진을 이주시켰다. 마침내 1947년도에 시험용 중수 원자로(NRX)가 완성되었고 1957년도에는 전력 생산이 가능한 최초의 중수 원자로(NRU)가 탄생했다. 10년 후인 1967년에는 온태리오주 북서쪽 휴론 호숫가의 작은 마을 킨카든에 처음으로 상업용 캔두(CANDU) 발전소가 건설되었고 온태리오 주에 전력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본격적으로  캔두 발전소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킨카든에 건설된 최초의 원전을 시작으로 그 지역에 8개의 원전이 건설돼 부르스 뉴클리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토론토 동쪽의 피커링 시에 있는 피커링 뉴클리어는 1971년에 피커링 1호기를 시작으로 1986년에 피커링 8호기까지 완공되어 8개의 원전이 건설되었다.  온태리오 주에만 16개의 캔두 발전소가 건설되었고 1983년에 뉴부른스윅주 포인트 레프로에 1개, 1993년에 온태리오 달링톤에 4개가 추가 건설되어 캐나다 전체에 건설된 캔두 발전소는 총 21개가 되었다.  달링톤을 제외한 대부분 197,80년대에 지어진 발전소라 시설이 노후하여 한동안 전력생산이 중단되었다가 수명 연장 프로젝트를 거쳐 재가동에 들어갔거나 아직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1981년 한국 최초의 캔두 발전소인 월성 1호기의 건설이 한창 일 때 당시의 캐나다 수상였던 피에르 트루도 수상이 한국을 방문했다. 트루도 수상의 방문 목적은 한국에 캔두발전소를 더 많이 파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한 뉴스매체가 트루도 수상을 영국 식민지였던 캐나다에 헌법을 완성시킨 영웅으로 칭송하면서 트루도 수상의 인기가 높아졌다. 그리고 2년 후인 1983년도에 현대자동차 포니가 캐나다에 처음 수출되었고 캐나다와 한국은 경제 교역이 급격하게 활발해졌다. 1990년도 초에 캔두 발전소가 3개가 한국에 수출되었고 월성 2,3,4호기가 건설되었다.  캐나다로 이민오는 한국인들도 급격히 늘어났고 많은 교민들이 토론토에 터전을 잡았다. 의도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한 뉴스매체의 트루도 추켜세우기 전략이 두 나라의 상호 협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결과를 가져왔다. 


1940년대 전쟁을 피해 캐나다에서 탄생한 캔두 발전소의 운명은 1970년대에 또 한 번의 큰 파란을 겪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수로 연구가 한창이었던 1960년대 캐나다는 영국 연방 중에(British Commonwealth) 하나인 인도에 중수로 연구 지원을 시작했다.  1947년에 완성된 NRX 연구용 중수로를 바탕으로 인도에 유사한 중수로를 지원한 것이었다. 인도의 부족한 전력 생산을 보충하려는 것이 목적이었고 인도는 핵 관련 평화 조약까지 사인했는데 10여 년이 지난 1974년에 인도는 핵폭탄 실험을 감행 했다. 중수로에서 플로토니움을 추출해 핵폭탄 제조에 성공한 것이었다. 전 세계는 경악했고 캐나다는 미국 유럽 구소련 등의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캐나다는 즉시 인도와 핵 관련 모든 연구 지원을 중단했지만 인도는 이미 고도의 핵물리학 연구가 진척되었고 1998년도에는 수소폭탄 실험까지 성공했다. 


1977년에 한국에서 중수로를 구입한 배경도 인도의 영향이 컸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한 가지 기술의 의존성 탈피라는 명목으로 구입했다지만. 그리고 한국의 원자력 연구에 대한 미국의 강도 높은 견제가 없었다면 한국 정부도 인도와 유사한 길을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1958년도에 설립된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 Korea Atomic Research Institute)에 대한 미국의 감시와 견제는 1983년에 월성 원전 1호기가 완공되자 한층 더 강해졌고 수시로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경고 없이 들이닥쳐 사무실을 뒤졌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대통령과 군부들에서 연구소에 핵폭탄 제조에 대한 무언의 지시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 문명이 배출하는 CO2(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난화에 100% 기여한다는 것이 학설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여진 지금 다시 원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학계는 현재 운영 중인 원전으로 인해 매년 약 4억 7천만 톤의 CO2 배출이 방지된다는 연구 발표를 했다.  석탄, 오일, 가스 등을 사용하는 화력발전소가 배출하는CO2의 양은 인간 문명이 배출하는 전체 CO2 양의 36.5%를 상회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동차를 비롯한 교통수단이 배출하는CO2양은 약 20.3%를 차지 한다. 즉 모든 화력 발전소를 원전, 태양광, 풍력, 등으로 바꾸고 자동차를 전기 자동차로 바꾼다면 지구 온난화를 유발하는 원인이 약 57% 줄어든다는 결론이다. 그리된다면 지구의 모든 생물들은  조금 더 깨끗한 환경 속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때마다 한국인들을 괴롭히는 미세먼지도 지극히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고..
  

(*)Battle of the St. Lawrence(세인트 로렌스만 전투) :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은 캐나다 동북쪽의 북대서양의 세이트 로렌스만에서 20여 척은 캐나다 수송선과 군함을 침몰시키는 등 활발한 전쟁을 일으켰다. 1942년에는 잠수함이 온태리오주 킹스톤까지 깊숙이 침투해 미국 전투기에게 침몰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캐나다 땅에서 발생한 최초의 전쟁인 1812 전쟁(영국 식민지 시대였던 1812, 미국이 캐나다를 공격한 소규모 전쟁) 이후 다시 캐나다 땅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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