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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gineer Jun 12. 2022

부다페스트 헝가리

프라하 역을 떠난 기차가 도시를 벋어 나자 광활한 들판이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어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눈 덮인 광활한 들판을 납치당한 닥터 지바고와 반정부 국민들을 태운 증기 기차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기약 없이 달리는 장면이었다. 우리가 탄 기차는 구식 증기 기차는 아니지만 프랑스나 이태리의 모던한 기차와는 현저하게 다르게 기능 위주의 기본적인 설비만 갖춘 낡은 기차였다. 구소련의 지배하에서 벋어 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라 객실 내부는 허름했고 서비스 수준도 서유럽에 비해 현저하게 쳐 저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도 밝지 않아 보였다. 부다페스트까지는 약 530여 Km의 낡은 철로 시스템을 8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완행열차였다.   

 

 

프라하를 떠난 지 약 4시간 정도 지났을 때 기차가 어느 역에 들어섰다. 창밖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보이고 브라티슬라바라는 역 이름이 새겨진 팻말이 보였다. 슬로바키아에 도착한 것이었다. 객실 앞쪽의 문이 열리며 군인 두 명이 들어왔다. 신분증 검사를 하는듯했다. 군인 한 명이 우리 가족 3명이 앉은 좌석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복도 쪽에 앉은 내가 먼저 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을 받아 들고  사진과 내 얼굴을 대조해 보더니 무표정하게 다시 돌려줬다. 여권을 받으면서 자쿠엠(슬로박 말로 thank you)라고 내가 한마디 하자 그 군인은 나를 한번 더 쳐다보더니 미소를 참는듯한 표정으로 여권을 들고 있는 가족에게는 손짓으로 괜찮다는 표시를 하고는 다음 좌석으로 갔다. 슬그머니 미소가 나왔다. 구소련의 지배하에서 벋어 난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은 공산주의의 살벌함에서 벋어 나지 못한 것인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다페스트가 가까워 오지 이번에는 여행 가이드 같은 유니폼을 입은 젊은 여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부다페스트에 관광 목적으로 오는 것인지, 예약 호텔은 어딘지 등을 묻고 한두 가지 주의 사항과 관광지를 소개하는 책자를 주었다. 부다페스트의 몇 장소는 밤에는 다니지 말 것을 각별히 언급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가 끝나고 느슨해진 틈을 타 유럽의 다른 나라 등에서 범죄 조직들이 침투해 우범지역이 형성된 것 같았다.  우리 일정은 2박 3일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닐 기회도 적었다. 우리가 부다페스트에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냉전시대까지 부다페스트는 전 세계의 모든 스파이들이 집결해 치열한 정보 전쟁을 벌리던 스파이 캐피톨로 알려진 도시였다. 도시의 왼발은 구소련의 영향 아래 오른발은 서방 민주주의 영향 아래 있어 양 진영의 끝없는 암투가 24시간 연중무휴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할리우드 스파이 영화, 미션 임퍼시블, 잭 라이언, 007 제임스 본드 영화에도 부다페스트는 자주 등장했다.  또한 도시 곳곳에 웅장하고 고색 찬란한 건물들이 많아 영화감독들이 선호하는 촬영지였다.  미션 임퍼시블, 다이 하드, 아이 스파이, 드라큘라(*) 등등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 아이리스 2, 닥터 이방인, 맨투맨,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등의 한국 영화와 드라마들이 부다페스트에서 촬영되었다. 1987년 한국에게 온통 슬픔과 분노를 안겨준 여객기 공중 폭파 사건도 부다페스트에서 그 음모가 꾸며졌다. 당시 그 음모를 실행하기 위해 평양을 떠난 북한의 두 간첩이 구소련 모스크바를 거쳐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88 올림픽 경기를 무산시키려는 것이었고 목적 달성을 위해 가장 악독한 수단을 선택했다. 한국 국적 민간 여객기를 폭파시겨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한국행을 거부하는 사태를 유발하려는 것이었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두 간첩은 부녀 행세를 하며 계획을 세웠고 일본 국적의 가짜 여권을 입수해 음모를 실행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올림픽 경기를 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두 번째는 헝가리의 대표 음식 항가리언 굴라쉬를 현지에서 맛보고 싶었다. 굴라쉬는 직장 동료 중에 헝가리 출신 올가라는 여성 엔지니어가 소개해줘 알게 된 음식이었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아 가끔 출퇴근 픽업을 해주곤 했는데 어느 날 우리 가족을 자신의 집에 식사 초대를 해 굴라쉬를 접하게 되었다. 매콤하고 부드럽게 푹 익은 갈비찜 같아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 훌륭한 음식이었다. 나보다 10년 정도 연상인 그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알프스 산맥을 걸어서 넘어 구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헝가리에서 탈출한 열혈 여성이었다.  일주일이나 걸려 알프스를 넘어왔다는데 낮에는 사람들 눈에 뜨일까 봐 숲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이동하느라 오래 걸렸다고 했다.  

 기차가 부다페스트 역에 도착했다. 거리로 나왔다.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역 건물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역 바깥으로 나와 거리에서 보는 장면은 침울하고 어두워 보였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 탓으로 여기기엔 무엇인지 너무 음산해 보였다.  인파 넘치는 파리나 런던과는 달리 거리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거대하고 멋들어진 건물들로 가득 찬 도시가 이렇게 한산하다니 너무 오랜 세월을 공산당이라는 강압 정치가 만들어낸 쓸쓸한 부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다페스트 켈레티 기차역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켈레티 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 체크인만 하고 거리로 나왔다. 주변에 식당과 쇼핑 상가등등이 있고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호텔에서 소개해준 식당에 들어서자 상당히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하얀 테이블 보가 깔려 있는 식탁들이 인상적이었다. 창가 테이블로 안내받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화려하게 수놓은 앞치마를 두른듯한 헝가리 전통 복장의 서버가 밝은 미소로 우리에게 메뉴를 돌렸다. 기차, 호텔, 식당에서 여러 명의 헝가리 여성들을 보았는데 각진 얼굴형의 서유럽 여성들과는 달리 둥그럽고 부드러운 얼굴 모양에 친숙한 느낌을 주는 인상들이었다. 헝가리 출신 유명한 할리우드 여배우 자매, 자자, 에바 가보는 동그란 인상의 조금은 동양적 매력을 뽐내던 배우였었다. 오래전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미스 헝가리 출신 자자는 결혼은 9번이나 한 스캔들의 여왕였었다. 앉은 지 오분도 안되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굴라쉬가 꽤 큰 수프 볼에 담겨 맛나 보이는 여러 개의 빵들과 함께 나왔다.  모두들 코를 벌름거리며 익숙하면서도 약간은 낯선듯한 향내가 있는 굴라쉬 냄새를 들이켰다. 푹익은 채소와 고기 한 점을 숟갈로 떠 천천히 입안에 넣으며 맛을 음미했다. 걸쭉한 국물과 채소가 은은하게 매운맛과 강하지 않은 한 두 가지 향신료 맛에 푹 절여진 부드러운 소고기와 어우러지며 입안에서 이리저리 맴돌았다. 와! 이 맛은, 순간 올가가 떠 올랐다. 그녀의 굴라쉬에서도 거의 비슷한 맛을 느꼈는데 그때는 그리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 비싼 음식점의 대표 요리와 버금가는 수준의 맛을 만들고 있었다니… 돌아가면 반드시 그녀에게 존경의 표시를 해야지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음날 아침 어제 눈여겨보아 두었던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진한 갈색에 투박해 보이는 빵은 독일의 라이빵들과 겉모양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 쫄깃함과 고소함은 한층 더했다.  제빵사인듯한 사람이 굴뚝처럼 생긴 페스트리를 쟁반 가득히 담아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달콤한 게피향이 카페 안에 가득 채워졌다.  그가 지나가기 전에 손가락 3을 들어 보였다. 모락모락 향이 올라오는 굴뚝 3개가 우리 테이블에 놓였다. 헝가리의 대표 디저트인 굴뚝케이크(Chimney Cake)였다. 달콤한 케이크 반죽을 숯불에 구어야 한다는데 화재 위험 때문에 건물 밖에서만 만든다고 했다. 달콤한 향을 거부할 수 없어 따끈따끈한 굴뚝을 한입 베어 물었다. 게피설탕이 녹으면서 바삭하게 코팅된 표피와 바닐라향의 쫀득한 속살이 입안에 남아있던 라이빵의 씁쓸한 맛을 완벽하게 제거해 주었다.  라이빵, 커피, 굴뚝케이크의 조합은 부다페스트의 아침을  더욱 향기롭게 만들었다. 

 

헝가리의 대표 페스트리이며 굴뚝 모형으로 만들기 위해 반죽을 원형틀에 말아 숯불 위에서 굽는다. 커피와 최고 궁합.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창밖으로 Hop-on-Hop-off 버스가 천천히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 저 버스를 타고 부다페스트 시내 관광을 하기로 한 버스였다.  버스는 약 한 시간 반 동안 21개의 부다페스트의 랜드마크 건축물들과 유서 깊은 장소들을 보여 주는데 내리고 싶은 정거장에서 내려 근처를 관광하고 30분마다 도착하는 버스를  다시 타고 내림을 반복하면서 모든 관광을 마칠 수 있게 만든 시스템이었다. 버스 관광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여러 유럽 도시들의 Hop-on-Hop-off 버스를 타 보았지만 부다페스만큼 많은 시간을 소모한 도시는 없었다. 그만큼 부다페스트는 흥미로운 도시였다. 언젠가 다시 한번 방문할 기회가 오면 그때는 좀 더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뉴브 강변에 위치한 헝가리 국회 의사당 : 많은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 아토믹 블론드, 트랜스포터 3 , 아이 스파이, 제미니 맨(윌 스미스;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진행자의 얼굴에게 따귀를 날린 배우), 이날 윤여정 씨는 여우 조연상 수상!

 

리버티 스퀘어: 헝가리는 로마시대부터 구소련 연방시대까지 수많은 침략과 억압을 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몽고의 침략, 세계대전, 오스트리아의 탄압적인 지배등등. 이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독립국가로 탄생한 기념으로 만들어진 자유의 광장이다. 공상 과학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메인 소재로도 등장..

 

 Chain Bridge : 다뉴브 강 위에 지어진 다리로 영국 엔지니어 팀이 런던 테임즈 강의 말로 다리를 모델로 1849년에 건설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폭파되었다가 전쟁 후 다시 복원되었다.

1265년에 지어진 부다 궁전은 헝가리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다가 18세기에 대부분 재건축되었다. 현재는 헝가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드라큘라: 원작 소설  드라큘라는 작가 브램 스토커가 1897년도에 발표했다. 소설의 구성은 편지와 일기, 신문기사 등으로 이어진 스토리 텔링 형식이었다. 가상의 인물인 드라큘라는 실존 인물인 15세기 루마니아의 월라키언 지역의 왕자 블라드 드라큘라를 모방했다고 알려져 있다. 블라드는 Vlad the Impaler라고 불렸는데 그는 적군 포로들을 긴 꼬챙이로 찔러 죽여 땅에 꽂아 놓은 잔혹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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