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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gineer Sep 09. 2022

함부르크 독일

2019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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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를 떠난 기차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코펜하겐을 향해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5일간의 런던 여행을 끝내고 함부르크에 온 이유는 개인적인 볼일도 있었지만 독일에 대한 나의 막연한 애정 때문이기도 했다. 독일은 한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국가 중에 하나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들의 성실함이 독일 정부를 감동시켰고 그 감동이 원조로 이어졌다. 이분들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파독 조선기술자 들이 있었다. 1970년대 초 수백여명의 조선기술자들이 독일 함부르크 시의 한 조선사에 파견되어 독일 배를 만들며 선진 기술을 배웠다. 한국인 조선사들이 만든 배는 영국의 까다로운 검사 조건들을 만족시켰고 독일 조선사의 신임을 얻었다. 고국에 돌아온 그들은 국내 조선 산업을 선전화 된 기술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끝내는 한국을 최고의 조선 강국으로 일으켜 세웠다. 


출처: 우리뉴스

함부르크 도시는 영어로 Hamburg로 명칭하나 독일인들은 Hamburger(햄버거)라 부른다. 우리가 즐겨 먹는 그 햄버거와 동일한 이름이다. 그러면 햄버거시에서 먹는 독일식 햄버거는 어떤 형태이고 맛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햄버거를 기대하면 오산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햄버거는 빵사이에 간 고기(패티)와 야채를 곁드린 샌드위치 형 음식으로 원조는 미국과 독일(함부르크), 두 나라가 동시에 언급된다. 어디가 먼저 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한다. 단지 햄버거란 명칭으로 보면 독일일 가능성이 높지만 샌드위치 형태인 지금의 햄버거는 미국에서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함부르크에 도착했을 시 처음 인상은 이태리의 베니스를 연상케 했다. 온 도시가 운하로 둘러싸여 다리를 건너지 않고는 아무데도 갈 수가 없을 정도로 다리가 많았다. 실제로 약 2500여개의 다리가 있다고 한다. 파리와 런던의 하얀 대리석 건물과는 달리 대부분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운하의 물을 붉게 물들여 험난한 도시의 역사를 보여 주는 듯했다.

함부르크는 지리적인 여건으로 일찌감치 공업과 무역업이 발달했다. 특히 조선업의 발달로 바다와 강 운하들을 통해 유럽의 많은 메이저 도시들과 교역이 가능했다. 1700년대 초에 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shipyard가 건설되어 대형 선박들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1850년에는 유보트(U-Boat)라 불리는 최초의 잠수함이 생산되었다. 산업용으로 생산되었지만 1910년경부터 영국에서 서서히 불기 시작한 군비 경쟁에 독일도 가세하면서 잠수함은 독일 해군의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14년에 발생한 지역 전쟁에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에 합세하면서 전쟁의 스케일은 커져갔고 반대편으로는 영국, 프랑스, 이태리, 미국등이 연합군을 형성해 최초의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18년에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고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다. 자연스레 함부르크의 선박 산업도 정체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1930년대 등장한 히틀러와 그의 나치 정당은 또 한번의 패권 야욕을 불태웠고 함부르크는 다시 재건되었다. 1939년 히틀러는 폴랜드 침략을 감행했고 세계는 또 다시 2번째 세계 대전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전쟁의 여파는 북미 대륙까지 번졌고 함부르크에서 건조된 잠수함들이 캐나다 내부까지 침투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출처: https://pjhollis123.medium.com/the-bismarck-767a7397ac73

함부르크에서 건조된 가장 유명한 선박은 2차 세계 대전시 영국과 연합군을 곤경에 빠르렸던 비스마르크호 일것이다. 250미터가 넘는 거대한 군함 비스마르크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군함였다. 2차대전이 한창였던 시기에 영국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해상 운송으로 전쟁 물자를 공급받고 있었다. 함부르크에서 출발한 비스마르크호는 북미와 영국을 오가는 북해 근처에서 영국 해군과 전투를 벌여 영국 해군의 상징였던 HMS Hood군함을 침몰시켰고 1400여명의 해군이 수장 되었다. 영국은 비통에 빠졌고 독일은 환호했다. 새로운 해상 강국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신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복수의 화신으로 불타 오른 영국은 2대의 강력한 군함과 항공모함을 재정비해 비스마르크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북대서양에서 선박 수리를 위해 점령지였던 프랑스로 향하던 비스마르크호를 찾아냈다. 발견 즉시 강력한 어뢰를 탑재한 전투기 16대가 항공모함에서 출정해 공중 폭격을 시작했다. 폴란드 군함까지 합세한 영국-폴란드 연합 해군은 쉴 새 없는 해상 폭격을 감행했다.  비스마르크호의  탈출을 막기 위해 항로를 차단하고 밤새도록 배 뒷쪽의 방향키를 집중 공격했다. 다음날 아침 방향키의 손상으로 항해가 어려워진 비스마르크호에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고 2시간 동안 수많은 포격을 받은 비스마르크호는 차가운 북해 바다속으로 수장되었다. 비스마르크호와 함께 2000여명의 독일 군인들도 죽음을 맞이했다.   


비스마르크호의 운명처럼 함부르크시도 전쟁 말기에 연합군의 집중 폭격으로 초토화 되었다. 다시는 전쟁의 꿈조차 꾸지 못하도록 연합군의 폭격은 함부르크의 모든 공업 시설과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 폭격으로 약 42000여명의 함부르크 시민들도 희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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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항구 축제   


하지만 지금의 함부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자유롭고 높은 생활 수준을 가진 도시로 거듭났다. 함부르크의 역사를 보면 왜 독일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임을 알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독일연방 국가 체재에 속하지 않고 독립된 도시국가의 형태를 19세기 초까지 지니고 있었다. 현재에도 행정적으로 독립된 자치 도시로 남아있다. 이런 영향으로 햄버거스(Hamburgers)로 불리는 함부르크 시민들은 종교, 패션, 음악, 정치 등에 편견이나 갈등이 없다. 즉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한다.  여담이긴 하지만 미국 뉴욕시에 911테러를 감행한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시발점도 함부르크에서 씨앗을 키웠다고 알려져 있다. 클래식 작곡가인 멘델스존과 브람스도 함부르크 출신이며 전설의 비틀즈도 함부르크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초 비틀즈는 영국의 항구도시 리버풀에서 존재감 없는 보이밴드로 활동하고 있었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나중에 합류) 들의 나이는 모두 20세가 채 안 된 하이틴들였다.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논 것은 함부르크의  나이트 클럽였다. 활동 거점을 함부르크로 옮긴후 그들의 연주 실력은 최고조에 달했으며 차츰 명성을 쌓아갔다. 마침내 Love Me Do라는 메가 히트송 음반을 출간했고 음악 세계에 혁명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나머지는 히스토리….      

 

비틀즈 Abbey Road album cover (Press/Apple Records)
Train Ferry 

                                                                     

기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고 앞쪽에는 페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페리는 우리가 탄 기차를 실고 바다를 건너 덴마크에 도착 할것이다.

Next Stop 코펜하겐 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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