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어느날 불쑥 찾아온 어린이란 세계

모두방과후 김수련 선생님의 이야기.

모두 방과후에서 일하고 있는 수련입니다. 막상 뭐라도 써야하니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무려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먹고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문장 하나 쓰는 데에도 이리 고전하는데 선생님이라고 불리다니요. 저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만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떤 순간에 저를 ‘선생’이라고 인지했을까요. 그저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기 때문일까요, 혹은 다른 누군가가 선생이라고 명명하는 걸 들었기 때문일까요. 먼저 태어나 경험이 많은 사람을 선생(先生)이라 부르는 것이라면 자격요건에 부합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선생 직함을 달 수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1달 전, 날마다 나이와 성별이 바뀌는 병에 걸렸다는 속임수를 써봤습니다. 월요일에는 7살 남성이 되었다가 화요일에는 12살 여성이 되는 식이지요. 아이들의 존댓말이 민망하게 느껴져 시작한 것이었는데 꽤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7살, 12살이 된 제게 더 이상 어떠한 권위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어린이의 세계와 보다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오직 하나뿐인 이야기를 해주었답니다.



맞춤법, 띄어쓰기 엉망이어도 마음을 울리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지요. 아무리 애를 써도 ‘선생’인 저는 죽어있는 글을 쓸 때가 더 많습니다. 이제 제쳐두었던 질문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관계에서 과연 누가 ‘선생’이 될 수 있는 걸까요.

모두가 경험하지만 곧 잃어버리고 마는 어린이의 세계는 경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경쾌한 언어를 내뱉으며 슬픔을 노래하고, 분노로 가득한 발길질을 하는 동시에 사랑을 토해내지요. 시우의 피아노 선율과 라희의 구구단 음률은 너무나도 살아있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니 저의 역할은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다운 빛깔과 이름을 오래 기억해두는 것. 나다울수록 안전함을 느끼도록, 아이들에게 그런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대안교육의 전망과 방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