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선 선생님에게 듣다.
지난 2월 28일에 이우교육공동체에서 박복선 선생님을 모시고 ‘대안교육의 전망과 방향’을 주제로 집담회를 열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2월 28일 이우교육공동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대안교육의 전망과 방향>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내용과 질의 응답의 일부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옮기면서 일부 내용을 줄이거나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 박복선 선생님은 이우학교 두 번의 평가에 모두 참여 해 주셨으며 이우학교 뿐 아니라 청소년들의 교육과 성장에 대한 열망과 관심을 바탕으로 여러 일들을 해 오셨습니다. 전교조 결성으로 해직과 복직의 과정에서 또 다른 대안을 꿈꾸며 학교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우리교육》에서 편집장을 거쳐, 성미산학교에서 교장을 하셨으며 지금은 크리킨디센터 전환교육연구소 소장으로 계십니다. 저서로 《가장 민주적인, 가장 교육적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공저) 등이 있습니다.
대안교육의 전망과 방향
반갑습니다. 소개해 주신대로 이우학교와는 전부터 이런저런 인연이 있었고, 이우학교 선생님들과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우학교는 제가 되게 좋아하는 학교고, 이우학교의 역할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웃음)^^ 주어진 제목이 굉장히 거창하죠. 제가 이 주제에 대해서 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늘 그렇듯이 자기 경험의 한계 안에서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삼 ‘대안교육의 방향’을 묻는 것은 이우교육공동체 내에서 ‘대안성’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번 학교평가 기간에도 여러 선생님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도 했는데요, 스스로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아요. 제가 정답을 말할 처지에 있지는 않기 때문에, 다 같이 스스로 질문을 해 보는 방식으로 시작해 보고 싶습니다. 대안교육이라는 것은 다 알다시피 너무나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고, 대안교육의 상도 제각각입니다. 이우교육공동체 내에서도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해요. 물론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론의 장에서 무엇이 다른지 서로 확인하는 것은 필요하죠. 그래야 다름이 풍부함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질문은 ‘이우에게 대안교육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각자 생각해 보세요. 두 번째는 ‘이우학교는 대안학교인가’라는 겁니다. 이번 평가에서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좀 되었죠. 저는 이 질문을 조금 바꿔서 ‘이우학교는 대안학교여야 하는가’ 묻고 싶어요. 사실 대안학교라는 게 그 자체로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을 가치평가적인 언어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대안’이라는 말을 놓지 않고 이렇게 가지고 있는가? 혹시 습관이나 강박관념 같은 것은 아닌가? 만만치 않은 질문이지요. 세 번째로는 ‘이우는 대안교육 운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거 같습니다. 저는 ‘대안교육연대’의 운영위원장을 하기도 했는데,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 이우학교를 대안학교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어쩌면 당연한 거예요. 이우학교에 대해서 폄훼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안교육의 지형도 자체를 놓고 보았을 때 이우학교의 위치가 좀 애매한 거죠. 크게 보면 우리 편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무언가 함께한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우는 누구와 함께하는가?
아마 이우학교 설립 초기에는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을 거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 설립하시는 분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회적 맥락에서, 또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형성된 공동의 생각과 느낌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났고, 세상도 많이 바뀌었고, 구성원들도 바뀌었어요. 특히 교사들도 많이 바뀌었고, 대안교육이라는 것에 참여하고 있는 부모들도 굉장히 많이 바뀌었거든요. 지금 상황에서는 어쨌든 이 질문들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들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사나 부모들 그리고 교육공동체에 참여하는 많은 분들이 서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토론도 해야 합니다. 물론 정답 찾기는 아니고, 공동의 인식이 어떤 것인지, 어느 지점에서 생각이 갈리는지 좀 맞춰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실 별로 당연한 것이 없어요. 초기에 참여하신 분들은 ‘당연히’ 대안학교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늦게 참여하신 분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물론 그 분들도 이우가 대안학교라는 것을 알고 오셨고, 이우를 대안학교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대안학교’라는 것을 깊이 고민하고 있을까, 그것은 잘 모르죠. 또 초기에 참여하신 분들이라고 해서 대안교육에 대한 고민이 깊을까? 그것도 모릅니다. 관성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우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 운동성, 혁신성에 대해 질문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저는 '대안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좋은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에서 시작했다고 봅니다. 사실 이 질문은 대안교육만이 아니라 모든 교육을 고민할 때 제일 먼저 오는 것이죠. 좋은 교육이란 결국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갖게 하는 것, 좋은 삶을 가어 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니까요. 다시 말하면, 교육은 부모와 교사가 아이들을 좋은 삶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사나 부모가 먼저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하겠죠.
‘인도’라는 표현이 좀 걸리는데요, 대안학교는 학습자 중심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어른이 무언가를 가르치는 장면이 연상되는 말을 쓰는 걸 꺼려합니다. ‘배움’이라는 말을 쓰게 된 맥락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가르침이 폐기될 수도 없습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서로 적대적인 것은 아니고요, 전에 자주 쓰던 표현을 살리면 변증법적으로 통합이 되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청소년이 어떻게 세계와 만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저는 가장 좋은 방식은 지혜로운 어른의 안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스스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계속 물어야 하고, 아이들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계속 묻도록 해야 합니다.
일반 학교에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잘 배우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대단히 허약한 전제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질문도 하지 않아요. 이제 우리가 기후 위기라든가 코로나 팬데믹이라든가 부의 불평등 같은 큰 문제들을 보면서 계속 확인하는 것은 ‘정말 이 체제 내에서 좋은 삶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정말 좋은 삶이 무엇이고 그 좋은 삶을 구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묻게 됩니다. 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인데, 제도교육에서는 그것을 안 하거나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교육’을 상상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좋은 삶, 좋은 교육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되고, 항상 우리가 뭔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근본으로 돌아와 그 질문을 다시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이 그럴 때라고 생각하고요. 일상에 매몰되다 보면 큰 질문들을 잊고 살아요.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의 근본을 되돌아 보듯이, 대안교육운동이 위기라면 지금이야말로 근본을 다시 물어야 할 때예요. 이제 우리가 20년 정도의 시간 동안 사회의 변화라든가 사회운동의 변화를 보면서 가지고 올 수 있는 언어들도 풍부해 졌고, 상상력도 확장 심화되었거든요.
제가 보기에 이우학교가 그런 것을 많이 배우지 않았어요. 일상적인 일들을 해내기도 바쁘고, 일의 습관과 관성도 있을 것이고, 혁신학교의 리더로서의 외적 혹은 내적 평가에 자족한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아무튼, 저는 이번에 이것이 굉장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우학교가 외부와 소통을 별로 안 했구나. 외부로부터의 자극도 별로 없었구나’라는 생각을 몇 번 했어요. 물론 재작년부터 이런저런 시도들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 정도의 넓이와 깊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국가와 자본을 넘어서의 창조적인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저는 공동체든, 마을이든, 대안학교든 저항과 창조의 공간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거점이 되어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고 보는데요, 그러한 실험을 하고 있는지, 그러한 운동적 방향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요즘 ‘마을’이 유행어가 됐어요. 혁신교육과 관련해서 ‘마을교육공동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을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논의는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전에 혁신학교나 부모 모임 같은 데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으면 교사나 활동가들에게 ‘마을이 뭐냐’고 묻곤 했어요. 아니면, ‘왜 마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어요. 대부분의 경우에 학교가 하기 어려운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곳, 활용할 자원이 있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학교가 싼 값에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곳이에요. 물론 그게 꼭 나쁜 게 아닙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해야지요. 그리고 이용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굉장히 좋은 학습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환’의 관점에서 볼 때 마을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좋은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최소의 단위이기 때문이에요. 말하자면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잘 지켜내고, 나아가 더 좋은 삶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교육이 좋은 삶의 비전을 갖게 하고, 좋은 삶을 구현해 낼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라면 마을이야말로 아주 좋은 교육의 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식이 너무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마을이라고 하는 것을 자원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어요. 실제로 저도 성미산 학교 있을 때,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와 혁신교육지구 사업을 해 본 적이 있는데, 축제 같은 거, 진로 체험 같은 거 그냥 해 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실제로 해 보면 좋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계속 이어가려고도 하죠. 그런데 딱 거기까지예요. 교사들 탓하는 게 아니라, ‘마을교육공동체’라는 거창한 말을 쓸 정도 넓고 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우학교도 마을과의 연결을 많이 고민하는 것 같은데, 어떤가요?
요즘 널리 쓰이는 말을 빌어서 표현하면, 교육이라는 것 그리고 교육 운동이라는 것은 좋은 커먼즈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공유지로서 어떤 학습공동체를 만들고 그것을 잘 가꾸어 가는 것이에요. 학교도 하나의 공유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대안학교라면 당연히 국가와 자본을 넘어서는 저항과 창조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공유지를 만들고 잘 가꾸는 것 자체가 좋은 교육이기도 하고요. 대안교육 운동 전체를 위한 커먼즈가 많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말로는 연대를 이야기하지만 실질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산이 없어요. 대안교육이 한 일이 참 많은데, 그것들이 축적되고 공유되지 않아요. 공동으로 연구해야 할 것들이 참 많은데 연구소 같은 것도 없습니다. 학교 하나 잘 가꾸어 가는 차원을 넘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운동이 되려면 공동의 가치와 방향성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실험을 하고 공유하는, 서로를 자극하면서 함께하는 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요. 대안교육의 활로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그런 게 있어야 합니다.
이우학교는 이념형 비인가 대안학교와 혁신학교가 이상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웃음) 학교지요. 굉장히 독특하고 의미있는 모델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우교육공동체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방식도 독특합니다. 대부분은 학부모가 만들든지 한 개인의 설립자가 자신의 교육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만들지요. 성미산학교 같은 경우도 마을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부모들이 만든 거예요. 이우교육공동체의 많은 분들이 이우학교에 아이를 보내셨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형식적으로라도 교육공동체와 부모를 분리해 냈다는 것이 저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다른 의미의 공공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우교육공동체가 하고 있는 일은 주로 학교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되게 조심스러울 거예요. 학교에 무엇인가 이야기하면 간섭하는 것 같고, 어떤 이야기는 너무 나아간 거 아닌가 검열도 하게 되고 그러죠.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당연히 그렇게 가요. 이런 구조에서는요. 그리고 학교라고 하는 것은 구심력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외부라는 것이 쉽게 끼여들기 어려워요. 아까 이우가 외부와 소통을 별로 안 했다고 말씀드렸지만, 이우만 그런 게 아니예요. 대부분의 대안학교가 그렇습니다. 학교를 일단 만들어 놓으면 일상적인 일을 꾸려 가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쁘고 힘들어요. 그리고 교사들은 그것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해요. 그리고 그런 일상적인 일이 자연스럽게 운동으로 연결되어야 해요. 교사들에게 ‘운동적인 어떤 것’을 더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큰 그림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게 해야 합니다. 이런 소통이 안 되면 서로 할 일이 없어요. 여론 조사를 해보면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교육공동체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고, 교육공동체는 교육공동체대로 정말 좋은 뜻에서 학교 일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지만 적절한 매개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이 문제는 구조적으로 교육공동체가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를 포함하지만 학교를 넘어서는 큰 그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그림이 좋은 삶, 좋은 교육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그것을 실현해 가는 것이 어떻게 운동이 되는지를 학교 구성원들이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학생들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것을 학생들도 보고 배우거든요. 수업을 통해서, 언어를 통해서, 지식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어른들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는 게 큽니다. 특히 대안적인 삶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에 좋은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교사와 부모가 아이들을 좋은 삶으로 인도할 때 어른들에 대한 신뢰, 사회에 대한 신뢰 같은 것이 없으면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교사와 부모가 공적인 삶에서 존경할 만한 어른이라고 느낄 때 인도가 강요가 되지 않아요. 또 학교를 포함한 교육공동체가 좋은 곳이라고 느껴야 학교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도 신뢰하게 됩니다.
저는 이우의 교육 운동의 목표는 공교육의 판을 바꾸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하려며 공교육의 최대치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최대치를 보여 주어야 거기서 ‘공교육의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게 있을 거예요. 물론 이 최대치를 누가 평가할 수 있는지는 어려운 문제지만요, 실천가들이 느끼는 감이라는 건 꽤 정확하다고 저는 믿어요. 아무튼, ‘우리가 정말 해볼만큼 했다’라고 할 수 있어야 그 느낌이 옵니다. 일반 대안학교에서 하는 시도들을 이우학교에서 많이 하는데요, 물론 그것들이 교육적으로 괜찮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겠지만, 이우가 정말 보여줘야 할 것은 공교육의 최대치 아닐까요? 지금 학교에서 하는 지식교육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지식교육에 대해 제대로 비판을 하려면 정말 잘하는 지식교육에 대해서 비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잘하는 지식교육은 찾아보기 어려워요. 지식교육을 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지식교육의 최대치에 도달해 봐야 지식교육의 한계와 문제점을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고, 그 대안도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식교육을 예로 들었지만, 이것 말고도 많이 있을 겁니다. 이런 점이 이우학교가 비인가 대안학교와는 달리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어떤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계죠. 특히 국가와 자본을 넘어서는 삶 같은 것들은 래디컬한 실험을 하지 않으면 보여줄 수 없습니다. 요즘 협동조합, 사회적 협동조합을 많이 만듭니다. 한때 학교 협동조합이 뜨기도 했죠. 그런데, 협동조합을 왜 하나요? 소박하게는 학생들이 직접 경제활동을 하고, 알바 자리를 만들기도 하죠. 제대로 운영한다면 좋은 프로젝트가 됩니다. 그런데 전환의 맥락에서 협동조합은 이윤 추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는, 시장 경쟁 시스템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본주의 경제와는 다른 경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겠죠. 학생들이 체감할 수 있게 가시화하는 어떤 결과를 보여줘야, ‘아, 저런 것이 가능하구나, 저렇게 사는 방식도 있구나’ 알게 됩니다. 대안학교라면 당연히 대안적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우교육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큰 자산 중의 하나가 연구소예요. 제가 학교평가에 참여하면서 이우학교 처음 와서 연구소를 운영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어요. ‘이우학교 만든 사람들의 내공이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그 어려운 재정 형편에서도 연구소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우학교 설립자들이 멀리 깊이 보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읽었어요. 연구라는 게 혼자 책 보는 게 아니잖아요? ’대안교육이란 무엇인가‘, ’이우는 어떤 대안교육을 하는가‘, ’대안교육 운동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가장 깊이 고민하고 답을 찾는 것은 연구소의 몫입니다. ’우리가 잘 하고 있는가‘, ’공동체 내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늘 하면서 공동체가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것도 연구소의 몫입니다. 연구를 한가한 일로 여기는 풍조가 있는데요, 물론 연구소의 일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니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는 우리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는 키를 찾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한 거 같아요.
래디컬한 실험도 연구소가 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이미 연구소에는 지역과 연계된 청소년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 같으면 그곳을 래디컬한 실험을 하는 곳으로 세팅할 거 같아요. 이우학교는 제도권에 발을 걸치고 있어서 장점도 있지만 제약도 많을 겁니다. 제도의 한계를 벗어나 정말 해 보고 싶은 것을 해 보는 겁니다. 그 성과를 학교에 도입하고요. 이번 평가를 하면서 연구소 존재감이 너무 미미해서 놀랐습니다. 물론 이런 것을 꼭 연구소라는 형식을 통해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하는 그룹이 어딘가에 있으면 되는데, 그런 거 같지는 않아요. 아무튼 래디컬한 실험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인식 지평을 넓히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우교육공동체 안에는 이미 연구소가 있고 초기에 많은 일을 했는데, 이렇게 좋은 자산을 왜 활용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사회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교사들은 너무 바쁘고 힘들어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일을 더 얻는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물론 교사를 하다 연구소에서 일을 하는 순환방식은 가능하겠지만 일을 늘리는 방식은 좋지 않아요. 이우교육공동체가 정말로 이우학교가 대안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우교육공동체는 학교에서 하기 어려운 일을 해 주셔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세계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됩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 내가 사는 마을이 좋은 곳이다’라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그런 신뢰가 있어야 어른들이 좋은 보여줄 때 자기 지향을 갖게 됩니다. 물론 어른들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아니고, 자기들 방식대로 합니다. 또 대안교육에서는 학교나 마을이 레퍼런스 그룹이 되어야 합니다. 비인가 대안학교 청소년들은 소수자, 비주류 정체성이 강합니다. 특히 진로와 관련된 부분에서 예민하고 좀 과잉되어 있어요. ‘내가 잘 살고 있는 거야’, ‘나만 뒤처진 거 아냐’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안정적으로 붙잡아 주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레퍼런스 그룹이에요. 친구도, 선생님도, 혹은 마을 사람도 나와 같이 다른 삶을 꾸리며 잘 살고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앞에서 했던 질문을 바꾸어 보면,
‘이우는 좋은 삶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가’ 정도가 되겠네요. 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큰 질문,근본적인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교육의 차원에서는 좋은 삶을 조금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청소년 수준에서 교사들은 교사 수준에서 마을은 마을 수준에서 그것들을 실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 체제 밖 혹은 체제 너머를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안입니다.
학교가 실험할 수 있는 래디컬한 실천은 무엇이 있을까요?
영어로 ‘래디컬’은 우리 말로는 ‘근본적’, ‘급진적’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제가 보기에 제도 교육에서 급진적인 것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예요. 이우학교 선생님들이 잘 알고 계신 사토 마나부 교수님이 어떤 자리에서 ‘인식은 래디털하게 실천은 현실적으로’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저는 이 구절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래디컬하다는 것은 주로 인식론에서 쓸 수 있는 말인 거 같아요. 근본을 파고 드는 집요함, 그래서 현실을 전복하는 불온함 같은 것이죠. 앞에서 협동조합 이야기를 했는데요, 실제로 지금 학교에서 할 수 있는 협동조합은 한계가 뚜렷하죠. 그러나 협동조합의 근본이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를 구현하는 한 방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안에는 혁명적인 씨앗이 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이걸 아는 것이 중요하지요.
대부분의 혁신학교에서 ‘학생 자치’를 강조합니다. 학교 규칙을 학생들과 함께 정한 것이 혁신의 좋은 사례로 거론되기도 했어요. 자세한 과정을 잘 몰라서 언급하기 조심스럽지만 ‘그게 혁신?’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것이 대단한 성공 사례로 거론되는 것은 대안학교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학생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전교 체육대회에서 학급 유니폼을 맞춰 입을 것인가 같은 거예요. 혁신학교에서 학생 규칙을 정할 때 학생이 참여한 것은 그런 점에서 좋은 사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했는가입니다. 형식적인 참여일 수도 있고, 학생들이 자신들의 삶에 중요한 문제를 공론장에서 토론하고 결정하는 실질적인 참여의 첫 단계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정말 큰 차이겠죠. 학생 자치를 제대로 하려면 무엇보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고, 토론할 수 있고, 결정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일반 학교에서 규칙을 정할 때 학생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급진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근본적인 실천일 수는 있을 거 같아요.
이우학교에서도 텃밭을 가꾸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고 무언가 생산한다는 점에서 좋은 교육이라고 인정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삶의 자립, 자연과의 깊은 관계 맺기, 협동적 생산 등 전환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아주 래디컬한 실천이 되는 겁니다. 인식이 래디털한 것은 실천의 방향을 정하고, 단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텃밭이 자립의 거점이 될지 그냥 체험학습장이 될지는 그것의 방향성에 의해 결정되는 거 아닐까 싶네요. 제가 비인가 대안학교에 있으면서 알게 된 것은 일반 학교의 힘이 정말 막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을 좋은 방향으로 쓰지 못하고 있어요. 이우학교는 그런 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다고 생각합니다.
대안학교의 혁신이 실질적인 부분에서 주춤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배움과 교육에서 고전적인 딜레마가 내 안에서 생겨나는 것들과 밖에서 들어가는 것과의 갈등이에요. 나의 흥미 나의 관심 이런 것들이 나의 안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하는 데 물론 기질 같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관심과 흥미는 밖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좋은 삶, 대안 같은 것은 고립된 개인에게서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생들한테도 좋은 삶, 대안 같은 것은 보여줘야 합니다. ‘아 저런 것도 가능하네, 저거 멋있어 보이는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 점에서 대안학교들도 밖, 외부와의 소통이 필요한데, 그게 잘 안 됐다고 봅니다. 일단 학교는 너무 바빠요.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인식과 실천은 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울타리 안에 갇혀 있어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런 것은 좀 의도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해야 하고,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나 부서가 내부에 있어야 합니다.
생태주의적 전환이 필요한 시기인데 구체적인 실천으로 어떤 것을 제안하실 수 있으신지요, 학교 단위에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은 무엇이 있을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근본적인 전환이 뭔가 거대한, 눈에 확 띄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관점을 바꾸는 것, 맥락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학생이 기후 위기 문제를 고민하다가 채식을 하겠다고 선언할 수 있어요. 참고로 채식 선택권은 서울시 교육감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추진 과제로 제시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럴 때 학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택권을 주면 되는 건가요? 그런 선언을 학교 공론장으로 가지고 와서 왜 채식을 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가 정당한 것인지, 그런 실천이 공공선에 기여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공동체는 개인을 배려해야 하는지 나아가 공동체가 공공선을 구현하는 데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토론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맛과 영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식단을 차릴 수 있는 역량도 길러야 합니다. 학교 텃밭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좋은 배움이 일어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도 필요하고요.
요즘 이우학교에서도 마을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은데요, 제가 성미산학교에 있을 때 선생님들과 ‘전환마을’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토트네스 타운이 있습니다. 기후 변화, 피크 오일, 경제 위기에서 좋은 삶을 가꾸려면 마을의 회복력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환의 로드맵을 그리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에너지 자립이에요. 마을에서 쓰는 에너지를 마을에서 생산한다는 거죠. 그런데 자연에너지로는 지금 쓰고 있는 에너지를 충당하는 게 한계가 있습니다. 쓰는 에너지를 반으로 줄여야 해요. 에너지를 반으로 줄이려면 우리 삶도 크게 달라져야 합니다. 어지간한 것은 마을에서 해결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국가는 너무 멀고 개인은 외롭다. 앞에서 마을이 좋은 삶의 실현지라고 말씀드렸는데, 마을에서는 좋은 삶을 구체화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기계적으로 태양광 발전기 설치해서 에너지를 생산하면 탄소배출은 좀 줄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고, 우리 삶 자체를 바꾸어 내는 것이 생태적 전환입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든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학교는 말할 것도 없지요.
좋은 삶을 강조하셨는데 교육자 혹은 개인으로 보실 때 어떤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좋은 삶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요. 다만 제가 좋은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우리가 그것을 너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교육의 목적 논의에서 ‘좋은 삶’, ‘행복’이라는 말을 씁니다. 제가 ‘좋은 삶’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행복이란 말이 너무 개인주의, 주관성, 감각적 쾌락 같은 것으로 오염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말하자면, 공공선, 공적 행복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좋은 삶을 이루는 개인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지요. 너무 빈궁하거나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않거나, 친구가 없거나, 좋은 취미가 없으면 좋은 삶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의 좋은 삶이 개인적인 좋은 삶을 규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좋은 이웃이 있어야 하고, 좋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야 ‘좋은 삶’이 가능하죠. 좋은 삶의 중요한 요소가 ‘좋은 일’일 텐데요, 우리 사회에 좋은 일이 많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일은 내가 열심히 일을 하는 성과가 자본을 증식시키거나, 기득권의 힘을 강화하는 데 쓰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한데, 이 체제 안에서는 좋은 일을 찾기 어렵습니다. 전에 오마이뉴스에 어떤 교사가 글을 썼어요. 군대에 간 제자가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국정원 직원 선거개입이 화제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 제자가 자기는 국정원 직원이 이해가 된다고 했다는 겁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직장에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자립과 자치가 이루어지는 좋은 마을에 살고 있다면, 마을살이에 필요한 작은 일을 하면서 살아도 됩니다. 선물 경제, 순환경제, 공동체경제가 있는 곳에서는 돈을 좀 덜 벌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기후 위기 시대에 좋은 삶이 가능한가요? 뉴질랜드에 거부들이 거대한 벙커를 짓고 있다는데, 그 사람들의 삶을 좋은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다른 자리에서는 ‘생태주의적 전환’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합니다. 김종철 선생님 표현을 빌면, ‘근대 문명에서 생태 문명으로’의 전환인데, 생태주의 철학을 내세우는 것은 그것이 지금 시대에 우리 모두의 좋은 삶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이우학교 설립할 때 내부에서 ‘생태주의적 전환’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학교에서 구체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고 이 부분에서 더 많은 고민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