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방과후 김수련 선생님의 이야기.
모두 방과후에서 일하고 있는 수련입니다. 막상 뭐라도 써야하니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무려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먹고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문장 하나 쓰는 데에도 이리 고전하는데 선생님이라고 불리다니요. 저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만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떤 순간에 저를 ‘선생’이라고 인지했을까요. 그저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기 때문일까요, 혹은 다른 누군가가 선생이라고 명명하는 걸 들었기 때문일까요. 먼저 태어나 경험이 많은 사람을 선생(先生)이라 부르는 것이라면 자격요건에 부합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선생 직함을 달 수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1달 전, 날마다 나이와 성별이 바뀌는 병에 걸렸다는 속임수를 써봤습니다. 월요일에는 7살 남성이 되었다가 화요일에는 12살 여성이 되는 식이지요. 아이들의 존댓말이 민망하게 느껴져 시작한 것이었는데 꽤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7살, 12살이 된 제게 더 이상 어떠한 권위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어린이의 세계와 보다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오직 하나뿐인 이야기를 해주었답니다.
맞춤법, 띄어쓰기 엉망이어도 마음을 울리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지요. 아무리 애를 써도 ‘선생’인 저는 죽어있는 글을 쓸 때가 더 많습니다. 이제 제쳐두었던 질문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관계에서 과연 누가 ‘선생’이 될 수 있는 걸까요.
모두가 경험하지만 곧 잃어버리고 마는 어린이의 세계는 경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경쾌한 언어를 내뱉으며 슬픔을 노래하고, 분노로 가득한 발길질을 하는 동시에 사랑을 토해내지요. 시우의 피아노 선율과 라희의 구구단 음률은 너무나도 살아있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니 저의 역할은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다운 빛깔과 이름을 오래 기억해두는 것. 나다울수록 안전함을 느끼도록, 아이들에게 그런 공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