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로살다 May 22. 2023

마흔 하나, 화를 논하다

큰 아이가 최근 자주 경험하는 것이 있다.

바로, '화'.

분노, 억울함, 좌절감 등등.


세상을 경험한다는 건

어쩌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되는 것과 유사한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빽- 울기만 하면 모든 니즈가 해결되던

아가아가한 시절을 지나

이제는 바닥을 구르며 울고 소리질러도


-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라는 차가운 답변을 듣는 나이가 된 것이다.


아이도 나름대로 적응한다고 참고 사는데

가끔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베개를 주먹으로 내리치곤 한다.


어제 밤 잠자리에서도 애꿎은 베개를 상대로 화풀이를 하길래,

잠깐 1분 정도의 pause 를 두었다가

말 한마디와 손길을 건넸다.


- 호은아, 이리 와봐. 엄마가 할 말 있어.

- 아, 싫어!!! 진짜 생각할 수록 화나네 진짜..!

- 생각할 수록 원래 더 많이 화가 나는 거야. 이리 와, 엄마가 화나는 마음에 대해서 알려줄게.


아이는 엉금엉금 기어서 내 옆에 와 팔을 베고 누웠다.


- 엄마가 호은이 지금 얼마나 화나는 지 알 것 같아.

   마음이 부글부글하고 폭발할 것 같지?

   그래서 베개 막 때린 거잖아.

- 응.

- 엄마도 알아. 엄마도 그럴 때 엄청 많거든.

    그런데 이 화 라는 감정은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 마음을 다 태워버릴 수도 있어. 너무 화가 나면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못하고 그 감정에 사로잡히는거지.


- 우리가 다 타?

- 응. 어떤 할아버지 할머니는 평생동안 화가 난 채로 살아서 그 자식들한테도 맨날 화만 내니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대.

- 누구?

- 있어, 엄마 아는 사람의 할아버지 할머니.

   젊었을 때부터 화가 나는 일을 계속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다가 호은이 말대로 생각할 수록 너무 화가 나서 그 상태로 화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거야. 결국은 가족들도 없이 병원에서 혼자 지내신대.

- 그럼 너무 외로운거 아니야?

- 너무 외롭겠지? 맞아.

   외로울 뿐만 아니라, 화를 오래 내면 몸도 아프게 돼.

   그리고 얼굴도 화난 얼굴로 변한대.

- 어떻게?

- 호은이 예쁜 눈이 째려보는 눈으로 바뀌고

   표정이 계속 화난 표정인거야. 기분이 좋은데도 그렇게 보인다면 어떻겠어?

- ........

- 그리고 실제로 '화병' 이라는게 있어.

   화라는 강력한 감정 속에 빠져서 계속 누군가를 미워하고

   화를 내면 잠도 못자거든. 생각할 수록 너무 화가 나니까.

거기다가 밥도 못먹는대. 마음이 부글부글 흥분상태라서.

사람이 잠도 못자고 밥도 못먹으면 어떻게 될까?

- 죽어.

- 맞아. 진짜 화가 나서 죽은 사람도 있댔어.

  그래서 엄마는 이렇게 해.

  너무 너무 화가 날 때를 대비해서

  정말 정말 기분좋아지고 행복해지는 생각을 고르고 골라

  엄마 마음 속 작은 상자에 넣어 놓는거야.

  그러다가 진짜 화가 나잖아? 그럼 얼른 그 상자를 열어서

  마음을 꺼내. 그리고 화가 난 불타는 마음을 식히는 거야.


- '행복의 물'이네?

- 어, 맞네~ 행복의 물.

   행복의 물을 마음에 뿌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화가 좀 가라앉더라. 엄마가 호은이 마음 불에 탈까봐 이렇게 이야기 해주는거야

- 응 알았어...

- 아빠한테 지금 너무 화가 났지만, 아빠때문에 행복했던 거 생각해봐.

- 그런거 없어!

- 아빠가 목마 태워주고, 강원도 가서 게임해주고, 또 장난감 사주고 했던거, 기억 안나?

- 기억 나.

- 그때는 좋았었지?

- 응... 엄마, 화나는 일도 어차피 다 지난 일이잖아. 내가 화 낸다고 해서 과거의 일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나는 변신하는 로봇 생각을 할래. 유투브에서 봤는데....


아이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최신형 변신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이어간다. 아이의 얼굴에 화는 걷힌 듯 했고 눈은 나이트 등 아래서 반짝거렸다.


내가 아이에게 화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나 자신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어쩌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주제에 득도한 것처럼 가르치는 꼴이라니.


하지만 나름 이런 고차원적인 말을 알아듣고

바로 마음가짐의 변화를 보이는 아이의 모습은 실로 감격스러웠다.


아가야,

네가 앞으로 부딪칠 수많은 좌절과 분노, 당황과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엄마가 함께 고민해줄께.


뜻대로 되지 않아 매 순간이 실망스럽고 그래서 염세적인 사람이기 보다는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작지만 소중한 찰나를 감사하는 단단하고 건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뭐, 그런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아.


어쨌든 그건 너의 인생이니까.


응원한다, 아들.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 하나, 나의 착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