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해의 한 해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당시 약 300 가구가 모여사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앞은 바다이고 뒤는 산과 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고기잡이와 농사를 주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지금이야 서양식으로 지은 2층 집들도 있고 아파트 건물도 들어서서 몰라보게 변했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간간이 기와집들이 몇 채 있는 거 빼고는 거의 대부분이 초가삼간 찌그러져가는 집들에서 하루 세끼 밥을 근근이 이어가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내 부모님은 농사지을 땅도 없었고 아버지는 고기잡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타지에서 경찰관으로 임명되어 우리 마을에 오게 된 아버지는 여기서 엄마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초기에는 외갓집에 얹혀살다가 내 나이 다섯살 땐가에 바다가 바로 내다보이는 작은 초가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 아버지는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미 경찰직을 떠난 상황이었고, 얼마 후 시외버스 회사에 취직하셨다. 이때만 해도 우리 가족은 꽤 화목한 가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여름 저녁, 아버지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추어 엄마 손을 잡고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 마중을 나갔던 행복한 한 장면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가정 평화와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젊고 잘생긴, 따라서 호색가 기질이 다분했던 아버지는 어디를 가나 자주 여자 문제가 불거졌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얼마 못가 이 문제 때문에 결국 해고를 당했다.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부모님은 자주 타투셨고, 고기잡이나 농사와 거리가 먼 아버지가 다른 직장을 구하지 못하자, 급기야 엄마가 생활전선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옷장사에서부터 시작해서, 해초 및 미역 장사를 하다가 생선 장사로 생업을 이어갔다. 자연히 엄마는 집보다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집안 살림은 할머니가 도맡아 하시게 되었다.
엄마가 돈을 벌어 생계를 이어가자 아버지는 어쩌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는 열등감 때문이었는지 자주 술에 취해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고 그럴 때면 엄마와 자식들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해서 집안이 화목할 날이 별로 없었다.
다행히도 내게는 바다가 있었다. 여름이 오면 아침을 대충 챙겨 먹자마자 찬란한 햇빛이 반짝이는 해변으로 내달렸다. 내 두 여동생도 나를 따라나섰다(당시 내 두 남동생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비슷한 시간에 바닷가로 나왔고 해변은 금세 아이들의 재미난 놀이터로 변했다. 우리는 신발과 옷을 벗어 모래사장 아무 데나 던져놓고 팬티만 입은 채 바다에 뛰어들었다. 서로의 머리를 물속으로 집어넣어 물 먹이기를 했고, 어떤 바위 하나를 목표물로 잡아 누가 빨리 헤엄쳐 도착하나 시합하기도 했고, 자맥질을 해서 누가 백합을 더 많이 줍는지 내기도 했다.
한참을 물에서 놀다 이빨을 덜덜 떨 정도로 춥고 지치면 백사장으로 나와서 뜨거운 모래 위에 엎드려서 찜질을 했다. 그러다가 등이 뜨거워지면 구덩이를 파서 서로 파묻어 주기를 했는데, 여기저기서 목만 밖으로 내놓은 아이들은 마치 머리만 내놓은 두더지들과 흡사해서 서로를 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어느새 배가 고프고 점심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각자 집으로 들어가서 보리밥 혹은 조밥과 된장, 고추장, 풋고추, 생미역 줄 거지, 김치 등 갖가지 반찬들을 가지고 다시 해변으로 나왔다. 우리는 모래사장 위에 돗자리를 깔고 가지고 온 밥과 반찬들을 중간에 차려놓고 빙 둘러앉아 함께 나누어 먹었는데, 비록 꽁당 보리밥이었고 꽁당 조밥이었지만 생미역 줄 거지와 풋고추를 된장이나 고추장에 찍어서 함께 먹으면 그야말로 신선의 요리가 부럽지 않았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 맛이 그리워져서 여기 프랑스의 슈퍼에서 가끔 풋고추를 사서 쌈장에 찍어먹곤 하는데 그때의 분위기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맛있긴 하다. 내 입맛이 그리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겠다. 파리에서 생미역 줄기를 찾을 수 없는 게 아쉽다.
점심을 먹고 그릇을 집으로 갖다 놓고 다시 뛰쳐나온 우리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까지 물놀이를 하다가 어둑해져서야 저녁 먹으러 들어가곤 했다. 어떤 날은 어부들이 갓 바다에 그물을 놓아 멸치나 전어 등을 잡았는데, 어부들이« 후리여! 후리여! »하고 외치기 시작하면 동네 사람들이 뛰어나와서 약 백 미터의 거리를 두고 양쪽에서 응차, 응차 하며 그물을 잡아당겼다. 그럴 때면 굵직한 멸치나 전어들이 모래사장 쪽으로 밀려 나와 다글다글 끓는듯한 하얀 태양빛 아래에서 파닥거렸다. 아이들은 얼른 집으로 들어가 소쿠리나 대야를 들고 나와 파닥거리는 물고기들을 잡아 담았는데, 생생히 살아 날뛰는 물고기를 손으로 잡았을 때의 충만감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너무도 신이 나서 고기 한 마리라도 더 잡기 위해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어부와 어른들의 영차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물고기들은 물이 적어 파닥거렸고, 우리는 그들을 잡기 위해 파닥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그 즐거웠던 순간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같은 추억이다.
이때만 해도 나의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셔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기 때문에 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