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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Jul 21. 2022

마음먹은 거, 어디까지 해 봤니

 <안나>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어릴 적, 개학을 앞둔 어린 나는 밀린 일기장을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선생님께 제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지난 날짜에 언제 했는지도 모르는 일들을 대강 기억해 쓰거나 뜬금없는 이야기로 밑줄을 채우기도 했다. 내가 적는 것임에도 보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때로는 사실이 거짓과 뒤섞여 '단지 보여지기 위한' 페이지로 변모했다. 정작 선생님은 그 많은 아이들의 일기장을 섬세히 읽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성인이 된 뒤, 스스로 적었던 나의 일기장은 채워지다 말아 절반이나 공백으로 남기 일쑤였다. 결국 한 해가 지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아깝지 않았다. 빼곡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누가 알까 두려운 일들은 적지 않았으므로. 일부는 진실. 일부는 침묵이었으므로. 그런 주제에 누가 파헤칠까 무서워 서랍장 깊숙이, 책장 한 구석에 보이지 않도록 꽂아두었으면서. 나는 왜 누군가에게 들키기 싫은 이야기들을 일기에 적지 않았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나의 일기 속 작고 소탈한 거짓말들은 끝내 나만 알다 사라졌지만 유미의 거짓말은 인생 자체였고 영원한 비밀로 남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을 속이며 위조된 삶을 살았던 이유미의 죄는 명백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이유미의 삶은 언제부터 꼬이기 시작한 걸까.



"독립은, 부모의 실망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난 그게 제일 후회돼."


이유미는 나쁜 년이다. 이안나라는 이름으로, 남의 인생을 훔쳐 살았으니까. 그런데 나는 어째서 이유미가 가여워 견딜 수가 없을까.


강원도 홍천의 시장 어귀에서 양복점을 하던 유미의 아버지는 딸이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고 싶어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유미의 어머니는 말을 하지 못해 수화로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며 딸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 거짓말은 누구나 한다. 매 순간 진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으랴. 이유미의 거짓말은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 주지 않기 위해라는 핑계로 시작한다. 일련의 사건 때문에 홍천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던 이유미는 그곳에서 날로 추락하는 성적에 절망한다. 대학 합격의 꿈이 좌절되고, 먼 곳에서 제 뒷바라지를 하는 부모님에게 대학교에 합격하게 되었노라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 이야기는 유미의 하숙집 아주머니가 알게 되고, 같은 하숙집에 살고 있던 대학생 지원의 귀에도 들어간다. 어느 순간 유미는 지원의 후배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유미는 합격하지도 않은 대학교의 학생 행세를 시작한다. 사실, 이유미에게는 진실을 말할 기회가 번번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들을 외면했다.


기어이, 이유미는 남의 이름을 훔쳐 이안나로서 삶을 시작한다. 난 그녀의 담대함에 혀를 내둘렀다. 사람을 볼 때 머릿결과 구두를 본다던 그녀는 점점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과 반짝이고 화려한 구두를 신는다. 그녀의 구두굽이 점차 높아졌다. 그녀의 거짓말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더 이상 후퇴할 수도 없을 지경에 다다른다. 하지만 이안나는 두려워할 겨를도 없이 코앞에 닥친 진실의 잔해들을 견뎌야 했다. 그녀가 단념하고 체념하는 과정이 낱낱이, 그리고 명확해서 딱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도 멀리 와 버렸다는 걸 진작에 깨닫고 있었다. 이유미의 삶은 애초에 없었고, 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건 이안나의 삶이 아니라 이유미, 자신의 삶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미의 민낯이 너무도 지치고 외로워 보였다.



 "유미야.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이 나를 공주 같다고 아나스타샤라고 불렀어. 그래서 내 두 번째 이름이 줄여서, 안나. 근데 사실은 안나 앤더슨이라는 여자가 이미 죽어버린 아나스타샤 행세를 하고 살았던 거래. 그걸 알고 나서 난 그 이름을 안 썼어."


이유미가, 이현주가 버린 이름을 사용한 대가는 혹독했다. 허나 가여움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난 그녀를 동정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녀의 삶이 화려해질수록 그녀는 점차 색을 잃었다. 그녀가 비로소 색을 찾았을 때는 거짓의 부산물들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황망한 이국의 한가운데에서 그 순간, 그녀는 보랏빛으로 반짝거렸다. 양치기 소년은 거짓말의 대가로 마을 사람들의 불신을 얻었으나 이유미는 거짓말의 대가로 모든 걸 잃고 자신조차 잃었다. 이유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매일 속죄하면서도 용서를 구할 사람이 곁에 존재하지 않아 죄책감으로 이따금 불면으로 밤을 지새우며,  끝내 행복하지 못하려나. 나의 작은 바람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멍청해서 선을 추구하며, 진실하게 사는 건 아니니까. 그녀의 삶을 돌아볼 때 그녀가 행복했으면 싶다가도 불행했으면 좋겠다. 양가적인 감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빛 잃은 눈동자의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조만간 <친밀한 이방인>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 아, 사슴을 생각하면 왈칵 눈물이 날 것 같다.



+) <안나>는 6부작 시리즈로 쿠팡 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 같은 팀, 팀원이자 막내인 그녀가 내 취향에 맞을 것 같다며 조심스레 추천을 해준 덕분에 내가 안나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내 취향에 대해 자세히 말을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녀는 어떻게 내 취향을 예상했을까. 사소한 관심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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