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꾹꾹이로 쓰세요
고양이들이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날이 추워졌다는 소리다.
여름에는 푹푹 찌는 열대야의 영향으로 이불 위 인간의 발 아래에서 몸을 길게 늘이고 자던 망구도 요즘은 나와 삼월 사이에 누워 잔다. 망구는 우리와 마주볼 줄 아는 고양이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모로 누워 있으면 아이의 얼굴을 하나하나 낱낱이 관찰할 수 있다. 우리처럼 눈이 두 개, 코는 하나, 입도 하나… 꼭 인간 같다.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하룻밤을 지새고 나면 ‘안녕’ 하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할 것만 같다. 망구는 우리의 어깨 위에 다리 한 쪽을 올려놓는다거나, 팔을 베개 삼아 잔다거나, 베개에 기대곤 한다. 네 아이 중 망구는 유독 특이하고 특별하다. 하루는 망구를 붙잡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우리 출근하면 인간으로 변하지. 퇴근 시간 맞춰서 뿅 하고 변해서는, 다시 고양이인 척 하는 거지.”
맑은 눈동자는 답이 없었다. 다 죽어가는 어린 고양이를 구조해 떠날새라 아플새라 매일 눈으로들여다보고, 마음으로 품다 보니 아이는 사랑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고 그만큼 표현을 배웠다. 또한 고집도 세졌다. 먹기 싫은 것은 죽어도 안 먹고 하기 싫은 것은 어떻게든 안 하려고 한다. 하고 싶은 것은 매일 같이 요구한다. 몇 달 전부터 그런 망구가 인간의 몸에 꾹꾹이를 하기 시작했다. 빈도수가 잦아져 최근에는 거의 매일 한다. 꾹꾹이라면 솔, 풀, 택도 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그들은 인간의 몸에 하지 않는다. 망구는 포근하고 부드러운 담요 대신 인간의 팔이라던가, 옆구리나 등을 찾는다. 자려고 누워 있으면 골골 소리로 시동을 건다. 엔진이 돌아가듯 작은 진동이 점차 소리를 키우고 꼼질거리던 발가락이 신체 어느 부위에 닿기만 하면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양 발이 번갈아 가며 피부를 누른다. 꾹꾹이는 어미에게 보호를 받던 새끼 시절 하던 행동이 애정표현으로 남은 거라고 한다. 젖을 먹는 새끼 고양이가 어미의 유선을 자극해 모유 생산을 촉진하는 행위로 심신이 편안할 때 혹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시도한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정 반대의 두 가지 경우 중 망구는 전자의 까닭으로 꾹꾹이를 하는 게 분명할 텐데.
지치지 않는 에너지. 멈추지 않는 고롱고롱. 이 행위는 한 번 시작해 약 30분 가량 지속될 때도 있으며 외부의 소음으로 인해 중단될 때도 있다. 모두가 자기 위해 누운 새벽은 소란할 일이 없고 인간이 침대 밖을 벗어나야 하는 의무감에 휩싸일 필요도 없는 때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하면 가만히 있어 주려 하는 편이나 발톱을 세워 맨살을 꾸욱, 꾹 누르는 고통에 몸을 베베 꼬다가 최대한 아프지 않은 부위에 눌릴 수 있도록 자세를 바꾸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짓은 더욱 빨라지고 간혹 어린 새끼가 울 듯 평소에는 내지 않는 목소리로 ‘삐약!’, ‘삐요오옹.’ 울기도 한다. 소리는 개의 짖음처럼 짧게, 혹은 사람의 환호성처럼 길게 이어질 때도 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하는 눈은 그 행위를 하는 내내 결코 깜빡이지 않는다. 사실 그 눈동자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초점이 없는 것이다. 목적지가 불분명하고 그대로 굳어 멈춰 있는 동공으로, 그토록 무언가에 홀린 것마냥 꾹꾹이를 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니 아이만이 알고 있는 일종의 의식인가 싶기도 하다. 나는, 그 의식에 바쳐지는 제물이거나. 그렇게 망구는 그대로 움직임이 잦아들며 잠이 들기도 하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푸다닥 침대 밖으로 뛰어 나가기도 한다. 이 정도 같이 살았으니 우리 아이들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신하는 나와 삼월에게 불현듯 긴장감을 주는 고양이들.
함께 사는 시간에 비례하게 새로이 나타나는 특성들은 무척이나 뜬금없고 예측이 불허하다. 이해할 수 없으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해야 할까? 우리 집을 하나의 생태계라고 친다면 인간과 고양이는 서로 다른 종으로 서로가 알아 듣지 못하는 언어를 서로에게 강요하면서도 기이하게 서로가 어우러져 살고 있는 이상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삶이 영속될 것이란 믿음은 분쟁의 기한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한 쪽이 너무 귀여운 탓일 터다. 우리는 귀여운 생명체가 자신만의 말로 속삭이는 애정의 단어를 하나 더 배운 셈이다. 고 작은 머리통이 자신이 갓 태어나 눈도 못 뜬 시절 배를 채우기 위해 본능적이고 열정적으로 행했을 행동을 다시 떠올렸다는 것도 신기하고 그 어린 고양이가 힘을 내고 싶을 때, 기분이 좋을 때마다 푸근한 시절의 향수를 기억하며 또래보다 큰 발을 아기처럼 움직인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저 아이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작은 꼬마 시절의 사진이라도 한 장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아이가 길 위에서 눈곱으로 도배되어 처량한 얼굴을 하고 우리 품에 안겼을 때부터 그 아이는 우리의 영원한 아기로 태어난 것이라고 위로한다. 한 켠에서는 어리광이라고 정의되는 꾹꾹이를, 너는 평생 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