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ar>
2024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이르긴 하지만 올해 내가 본 작품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고 싶은 작품. 더베어. 현재 시즌1과 2가 디즈니 플러스에 올라와 있으며 3 제작에 들어갔다고 한다. 시즌1 1화부터 두 번째 시즌까지, 정신 못 차리고 봤다. 사실 드라마 자체가 정신이 없다.
파인다이닝계의 유명 셰프인 주인공 카르멘이 돌연 자살한 형을 대신해 형의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샌드위치 가게는 식당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엉망이었다. 재정, 체계, 시스템. 게다가 직원들은 그들 각자의 말을 하느라 바쁘다. 인물들은 나를 몰이해 속으로 밀어 넣다가도 넓은 아량의 뭍으로 꺼내 놓았다. 그만큼 입체적인 인간의 면면을 보여주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레스토랑에 가면 요리에 관심을 갖는다. 요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방의 노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지 칼과 불이 난무하는 주방의 모습은 내게 다소 생소하고 거칠었으며 예민했다. 시즌1은 뾰족한 칼날과도 같았던 인물들이 점차 화합하는 과정을 나타냈다. 그 과정은 타오르는 불 같다가도 싸늘한 얼음처럼 식었고, 이내 다시 불씨를 밝혔다.
어느 날 형이 자신의 머리를 권총으로 날려버렸다. 형이 샌드위치 가게를 남기고 간 이유, 빌어먹을 세상을 떠난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부서지고 내려앉고 찌그러지고 그을린 형의 가게. 그 안에서 카르멘은 새로운 시작을 한다. 그러나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때때로 그는 곰에게 쫓기는 꿈을 꾸고 때때로 누군가 잔인하게 난도질한 자아를 붙잡고 겨우 버티며 산다. 지금보다 더 최악이 있을까 하지만 언제나 최악의 끝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처음이다. 드라마는 판타지와는 거리가 멀다. 뛰어나게 현실적이라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나도 살면서 한 번은 느껴봤던 것들이다. 분노, 짜증, 절망. 차라리 돌아버려 정신을 잃었으면 좋겠다고 느낄 만큼의 압박감. 누군가 넝마처럼 찢어 놓은 나는 다시 재생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내가 멀쩡하다고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린 모두 정상적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닐까. 어렵사리 고정해 놓은 막대가 부러지면 나는 땅바닥 속을 파고 들어갈 수도, 제어되지 않는 감정을 폭발시키며 여기저기를 망가뜨리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윤리적이지 못하게, 비도덕적이고 불성실하게 살고 싶을 때도 있다는 것은 비밀이다.
시즌1에서 나의 짜증을 유발하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카르멘이 ‘사촌’이라 부르던 리치. 그가 뱉는 언사는 괴팍하고 무례하다. 카르멘이 샌드위치 가게에 중구난방 흩어져 있는 시스템을 바로잡으려 할 때마다 리치가 툴툴거리며 삐뚤어진 분위기를 유도하고 불만을 터트린다. 카르멘과 리치는 허구한 날 싸운다. 그 둘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 가게의 직원들 모두 서로 싸운다. 어찌 보면 요즘 같은 때를 그대로 표현한 드라마 같기도 하다. 먹고살기는 팍팍하고 일은 많고, 돈 들어갈 곳은 왜 이렇게 많은지, 내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버티기엔 세상이 아니라 내가 곧 무너질 것만 같다. 나를 존중해 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고 사람들은 점점 이기적으로 변한다. 사소한 말을 크게 부풀려 화를 내고 피해의식 혹은 자만심에 젖어 있고 쉴 새 없이 타인을 탓하고.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도 희망은 있듯이 그들에게도 희망이, 꿈이, 사랑이, 목표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난다. 1과 달리 2는 인물 각자의 이야기를 에피소드 하나, 하나를 할애하며 소중히 다뤘다. 시즌2에서 최고의 인물을 꼽자면 단연 리치다. 목소리만 크고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기는 것이 특기였던 그는 직원들과의 충돌도 잦았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는 내게 있어 가게 내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자조차도 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아 그가 사고를 칠 때마다 혀를 차기 바빴다. 그렇기에 그의 성장 이야기는 더욱더 마음 깊이 와닿는다.
추천하는 에피소드… 라기 보단 같이 멘탈이 붕괴되는 에피소드로 시즌1의 7화, 시즌2의 6화를 언급할 수 있다. 시즌1의 7화는 에피소드 중 가장 짧은 분량이지만 몰아치는 속도와 충격은 엄청나다. 멈추지 않고 도는 카메라의 무빙으로 인해 나도 더 베어의 식당 직원이 된 것 같은 현실감을 느낄 수 있으며 동시에 10인 사업장도 되지 않는 식당 오픈 8분 전 직원의 실수로 300인분이 넘는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뮬레이션 체험 삶의 현장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와중에 그 누구도 요리를 하지 않고 각자 다른 공간에서 싸우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퇴사를 하겠다고 하고. 인생이 무료하고 자극이 부족하다 싶을 때 추천한다. 시즌2의 6화는 카르멘의 가족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는 에피소드다. 그들은 모두 불안정하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카르멘의 어머니 도나는 불안하다. 화를 냈다가도 웃고 슬퍼했다가도 친절해지고 우울해졌다가 다시 화를 낸다. 카르멘의 형 마이클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란 책임감을 등에 진 남자는 작은 자극에도 화산처럼 폭발한다. 작고 여린 유년기는 밀가루 반죽과도 같아서 주변 환경에 쉽게 모양이 바뀌는 것 같다. 우그러진 상태로 굳느냐 자신이, 혹은 누군가가 부드럽고 동그랗게 모양을 매만져 매끈한 형태로 다시 가꾸느냐의 차이다. 카르멘은 우그러진 상태로 성장했다. 평온하고 이성적인 것 같다가도 한번 뒤틀리면 돌이킬 수 없이 자신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시즌2에서 카르멘이 안타까웠다. 그의 친구들이 모두 나름의 속도로 성장하는 가운데 그는 결국 어둡고 컴컴한 냉장고 안에 갇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시즌3에서 그는 습하고 냄새나는 기억의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추천하는 편은 시즌2의 7화. 망나니 같은 리치의 성장 스토리이다.
일을 하다 보면 매일 같은 일의 반복이 지겨워질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이 한심한 짓을 내가 왜 하고 있나. 내 미래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 이로서 내가 얻는 것은 돈 말고 무엇인가. 아니, 그렇다고 부유할 만큼 돈도 많이 못 버는 것을 왜 붙들고 앉아 있는가. 내가 이걸 한다고 누가 알아주나. 의문과 자괴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진다. 나는 칭칭 감긴다. 땅굴은 깊이를 모르고 깊어져 왜 사니, 따위의 음울한 문장까지 발전해 하등 쓸모도 없는 나 자신을 욕하고 괴롭히기도 한다. 그것이 나를 비롯한 일부 직장인들의 숙명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그리고 다른 곳,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서도 사람들은 같은 고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우린 모두 잘하고 있을 텐데, 왜 나서서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숟가락, 포크를 닦는 일, 버섯을 손질하는 일에도 누군가는 보람을 느끼고 삶의 활력을 찾는다.
자랑스럽다. 이렇게 미치지 않고 버티고 사는 내가. 나의 일로 인해 나와 나의 고양이들이 밥 굶지 않고 산다는 것이. 반드시 누군가 인정을 해 줘야만 내가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냉랭한 질타와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뻔뻔함으로 무장하고 살자.
*드라마를 보고 이상하게도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극 중 등장하는 메시지 때문인 것 같다.
Let it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