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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Aug 10. 2024

누군가의 자유는 불현듯

결국 나의 무운을 빌며

올해는 숨을 죽이고 살아야 한다. 길을 가다 머리 위로 간판이 떨어질 확률, 횡단보도 앞에서 갑자기 내 앞으로 차가 달려들 확률, 요리를 하다 칼을 떨어뜨려 내 발등에 꽂힐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백 억분의 일의 확률로 내가 크나큰 해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한동안 평탄하게 산다 했지. 긴장을 늦추고 살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자다 심장이 멈출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한다. 갑작스러운 인생의 종결로 내가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7월 초였다. 이재야, 너희 부모님 사고 나셨대. 응급실로 가고 있대. 회의를 하던 삼월이 달려와 말했다. 드라마였다면 긴박한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거나 혹은 들리던 음악이 멈추고 '다음 이야기'라는 예고편이 이어질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직원들과 대화를 하느라 전화를 받지 않는 사이 철이 삼월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날 바로 본가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삼월이 함께 가주겠다며 운전대를 잡았다. 부산에서 병원까지는 3시간 40분이 걸렸다.


신호 대기 중이던 쏘렌토 앞에서 사고가 났다. 좌회전을 하던 1톤 트럭을 흰 SUV 차량이 달려와 박은 것이다. 트럭은 휘청였고 이내 방향을 틀어 쏘렌토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핸들을 쥐고 있던 엄마는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때는 늦었고,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에어백이 터졌다. 사고가 난 차량은 총 세 대였다. 그중 응급실로 실려간 사람은 나의 부모였다. 인생은 참 기이한 방식으로 비틀린다. 예측불가하게도, 가만히 있다가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억울하게. 천만다행으로 엄마는 팔이 부러지고 아빠는 갈비뼈에 금이 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엄마가 응급 처치로 시행한 커다란 깁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엄마의 오른쪽 자뼈와 노뼈가 네 개가량의 조각과 함께 깨끗하게 두 동강이 났다고 한다. 어안이 벙벙했다가 안도했다가, 현실적인 문제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간병은? 가해자와의 합의는? 망가진 차는? 처음 겪어 보는 상황이라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도 몰랐다. 접합 수술을 하기로 한 월요일이 있는 주에 동생 철은 회사 내부 교육으로 인해 서울에서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당장에 엄마를 돌볼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귀중한 평일 연차를 사용했다. 사실 회사로부터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오산이었다. 간병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일에 대해 얕봤다고 할 수 있다. 엄마의 수술 전날 다시 본가에 내려갔다. 엄마가 지낼 병실은 6인실로 다행히도 창가 앞에 배정을 받게 되었다. 침대 옆에는 간이침대가 있어 이불을 깔고 자면 제법 잘 잘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수술을 앞두고 엄마는 씻고 싶다고 했다. 맞은편의 할머니를 돌보던 간병인 선생님께서는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것이 나을 것이라 했지만 엄마는 완강했다. 청결을 중요시하며 깔끔하고도 정숙한 그녀는 무엇보다 머리를 감고 싶다고 했다. 난생처음 엄마를 씻겼다. 그녀는 나를 영 시원찮게 여겼다. 엄마의 기브스는 무겁고 불편한 데다 원하는 대로 동작을 할 수 없었고 그녀의 손이 되어야 할 나는 직접 씻겨 본 생명체라고는 고양이밖에 없었다.


작은 아기라면 수월했을까? 팔다리가 길쭉하게 자란, 자기 의사를 분명히 하는, 한쪽 팔에 큰 기브스를 매달고 있는 인간을 씻기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평 정도의 샤워실 안에서 모녀는 물과 비누거품과 씨름했다. 그녀는 깨끗해지고 나는 땀으로 샤워를 했다. 절대 손을 댈 일이 없을 것 같던 엄마의 신체 구석구석 내 손길이 닿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거부감이 없었으며 마치 아기의 피부처럼 보드랍고 연약해 헛웃음이 나왔다. 그 와중에도 린스까지 꼼꼼히 주문하던 그녀는 나중에는 머리를 말리는 것도 모자라 드라이까지 요구했다. 어차피 누울 거면서 단정한 머리스타일이 뭐가 대수라고. 그러면서도 내 손길을 영 시원치 않게 여겼다.


간병인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얼마를 지불해야 하지? 푹 젖은 티셔츠를 펄럭이며 머리를 굴렸다. 6인 병실에 머무는 네 명의 할머니들은 모두 파란 옷을 입은 간병인 선생님들과 함께였다. 자식의 도움을 받는 할머니는 우리 엄마 하나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할머니 축에도 못 꼈다. 그녀는 아직 할머니라고 불리기엔 어렸다. 그녀의 친구들은 애진작 며느리나 사위를 얻고 복숭아 같은 손주와 노닐거나, 황혼육아에 허리가 굽어가고 있었지만 서른여섯에 첫 아이를 낳은 그녀의 육아는 조금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가 친구들을 부러워할지 안타까워할지 물어본 적은 없으나 차라리 안타까워하길 바란다. 어쩌면 그녀의 생에서 외손주라고는 온몸이 털로 뒤덮인 고양이들 뿐일지도 모를 테니까.


병원의 하루는 나의 하루와는 전혀 달랐다. 새벽 다섯 시에 병실 불이 켜지고 아침 일곱 시에 첫 식사가 내어졌다. 점심은 열두 시에, 저녁은 여섯 시.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식사 시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의 침대 각도를 바꾸고 간이테이블을 펼치고 식판을 가져다주었다. 섬세하지 못한 왼손 젓가락질을 대신해 내가 쌀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었고 다 먹은 밥을 치우는 일까지가 식사 시간에 내가 하는 일이었다. 평소에는 수술을 한 팔의 열을 식히고 부기를 빼기 위해 수시로 얼음팩을 얹어야 했는데, 냉기가 사라질 즈음 꽝꽝 언 것으로 교체를 했다. 엄마가 화장실을 갈 때에는 물티슈를 챙겨 뒤를 따랐고 칫솔 위에 치약을 짜는 것까지, 물을 잘 마시지 않는 엄마를 위해 이따금 병원 근처 카페에 가서 아이스티를 사 오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큰 힘이 드는 일은 아니었으나 종일 온 신경이 한쪽에만 몰두해 있어야 했다. 따지고 보면 엄마는 아이 둘을 키우며 이것보다 더 성가시고 귀찮은 일을 몇 년이나 반복하지 않았던가. 이런 일쯤이야 며칠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엄마는 전치 13주 진단을 받았다. 그것은 즉, 아빠가 엄마 없이 13주를 보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빠는 지금껏 불균형하게 유지되어 오던 가사노동의 실체를 뼈저리게 깨달을 것이고 그간 우습게 여겼던 엄마의 노동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그로 인해 자신이 불편함 없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나는 엄마의 입원이 짧은 휴가이길 바랐다.


여덟 시가 되면 병실 불이 꺼졌다. 잘 먹고 잘 자기. 무리하지 않고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지내기. 그곳의 사람들은 회복을 하나의 의무로 여겼다.  아프고 싶어 아픈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살고 싶은 사람들.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 생존과 삶의 의욕이, 혹은 무기력이 교차하여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고 또다시 들끓는 곳은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곳이 못 되었다.


저녁을 먹고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때때로 알 수 없는 신음이나 비명이 들리곤 했다. 간병인 선생님은 해질녘 증후군이라고 했다. 일명 일몰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이 증상은 치매 환자들 사이에서 흔히 나타난다고 한다. 낮에는 안정적으로 지내지만 해가 질 무렵에는 불안해하거나 분노, 난폭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올빼미처럼 살았던 나는 병원의 이른 수면 시간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그런 때에는 간이침대에 엎드려 챙겨 온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거나 휴대폰으로 SNS를 하거나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곤 했다. 어느 밤에는 복도 끄트머리 병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의 목소리였다.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부르짖는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팔에 소름이 쭈뼛 일어섰다. 그러나 불 꺼진 병실은 고요했다.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으며 일어나 무슨 일인지 둘러보는 사람도 없는, 평화 그 자체였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해질녘증후군이 새벽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던가. 심지어 차갑고 딱딱한 복도를 맨발로 걷는 소리가 들렸다. 걷는 것이 아니라 뛰는 소리. 좁은 보폭으로 힘껏 딛는 소리였다. 할아버지는 누구를 그토록 찾는 것일까. 왼쪽 복도 끝에서 오른쪽 복도 끝으로 향하는 노인의 발소리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듯 간절했다. 애처로운 음성이 커졌다가 줄어드는 동안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얼른 자야 해. 불안정한 새벽.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날, 짐을 챙겨 병원을 나서면서도 나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무사할 테니까.



엄마는 여전히 병원에 있고, 경미한 마비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매일 저녁 병원 옥상에 올라가 야경을 보고 스스로의 힘으로 제법 나아진 자신의 팔에 감탄하며 이제는 세탁기 작동법을 알게 된 남편이 종종 싸 오는 설익은 단호박을 우물거리며 차라리 후련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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