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왜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가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 누가 지어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맞는 말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막상 결과는 전혀 다르게 되어 버리는 일이 언제나 생기기에 하는 말이다.
또 사람이라는 인격체가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인격체의 정도에 따라 결과가 얼마든지 대중이 원하는 방향을 따르기도, 외면하기도 한다.
2021년 코로나로 소규모 식당이나 다양한 상점들이 운영을 못할 정도로 매출이 급감했을 때 문재인 정부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재난 지원금을 전 국민 모두에게 지급한다. 자연스레 기본소득이 쟁점화되면서 주창자 이재명이 스포트 라이트를 받게 된다.
말 그대로 모두에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빈부의 차이도 없이 무조건적 제공이었다. 단, 지역화폐로.
지급 전에는 야당에서 절대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선별지급을 해야 한다. 또 도덕적 헤이와 같은 말도 이어졌다. 무조건 그렇게 돈을 주면 노동의욕을 꺾는다거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고도 했다.
잘 사는 사람들은 원하지 않으니 주지 말자고도 했다.
정작 지급하고 보니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선별 없이 모두들 신청해 죄다 써버렸다. 거짓말처럼 서민경제가 살아났다. 6개월 내에 사용하지 않으면 국가나 지자체로 귀속되어 버리기 때문에 지역구 내에서 90% 이상 사용됐다.
4인 기준, 한 가정에 100만 원쯤 지역화폐로 지급됐다. 사용기한도 6개월. 안 쓰고는 못 배기는 상황. 죄다 썼고 승수효과까지 있었다.
사람들은 식료품을 비롯한 필수품을 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침대와 소파를 바꾸는 사람도 있었고 안경테를 새로 구입한 사람도 있었다. 소상공인들은 환호했다. 지역에서 사용되니 시장에 활기가 돌았다.
그렇게 1차 재난지원금은 보편적 지급으로 정책의 효능을 입증했다.
선별보다는 보편으로 무조건 모두에게 주자는 주장에는 사실 이런 근거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지급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가난하다는 낙인을 찍는 것이니까. 열등감과 혜택을 누린다는 좋지 않은 감정도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에 지원금과 함께 남는다는 것.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에게는 왜 국가나 지자체의 정책에서 소외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있었다. 세금을 많이 내니 당연히 지원금도 같이 받는 것이 공정하다는 주장, 설득력이 있다.
고소득자를 비롯한 부자들은 어차피 세금을 많이 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1년쯤 뒤 재난지원금은 선별로 지급됐다. 소상공인 단체에서조차 보편적으로 무조건 주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무시됐다.
정치는 정치인들끼리 북 치고 장구치고 해서는 일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건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같은 당의 도지사인 이재명의 건의를 묵살하고 굳이 선별로 그것도 현금으로 재난지원금이 지급됐던 것이다.
이미 증명된 정책을 교묘한 논리로 수정한 것이다. 배경은 뻔하지 않을까. 이재명의 인기가 더 이상 올라가서는 곤란했을 것이다.
나는 이 사태 -보편적으로 지급된 재난지원금에서 선별로 바뀐 것- 가 당원과 국민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동기라고 본다.
윤석열 정권에서 야당이 된 민주당에서 이재명이 당대표가 되자 130만이던 당원이 250만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이건 재난지원금을 보편적으로 하자는 주장을 했던 이재명을 국민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세금은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다. 당연히 국민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경기하락국면에 이재명은 민생회복 지원금 지급을 주장한다. 물론, 현 정부와 여당이 호응할 리가 없다.
그런데 야당들이 입을 모아 함께 주장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민생회복 지원금 25만 원이 지역화폐로 지급되면 지역경제가 살아난다.
이것은 전에 그 효용을 맛봤던 소상공인들이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속세와 종부세를 줄여주는 것은 적극적으로 하는 정부가 서민들의 삶에는 무관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서민들이 원하고는 있지만 먹고사니즘에 바빠서 미처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런 민생회복지원금 정책의 실행이 아닐까. 야당들이 한목소리를 내야 할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