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방여자 Jul 20. 2023

국밥의 깊이는 알지 못해도


막 국밥집 앞에 도착했을 때 차창 유리에 비가 한두 방울 떨어졌다. 비가 걸음을 멈추고 유리 위에 착지할 때마다 발자국처럼 작은 원이 그려진다. 그것이 창 끝에 힘겹게 매달려 있다가 경사를 이기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차문을 열고 내렸다. 잔뜩 머금고 있는 것엔 언제나 어떤 심상이 생기기 마련이어서 나는 그것이 어떤 이의 감정이라도 되는 양 지켜보다가 이윽고 쏟아진 다음에야 자리를 옮겼다. 밖에선 익숙한  비냄새가 났다. 부리에 짓이겨진 풀냄새와 무른 흙이 버무려진 듯한 냄새. 비의 시작을 알려야 하는 사명이라도 띤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체취를 풍긴다. 


묵직한 출입문을 밀고 국밥집에 들어서니 에어컨의 찬 기운과 특유의 습한 기운이 함께 느껴진다. 이른 저녁이라 사람이 얼마 없다. 이곳의 메뉴는 단출하다. 국밥만 세 종류. 다가서는 여자에게 서둘러 주문을 하자 오던 걸음을 돌려 다시 주방으로 간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듯한 안도와 동시에 식상함도 느끼는 듯한 표정이다.


저녁 시간대를 대비해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반찬이 가득 올려진 쟁반을 이내 들고 나온다. 커다란 쟁반을 들기엔 너무 가느다란 여자의 몸과 흐트러짐 없이 모아 집게핀으로 올린 머리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귀 옆에서 시작된 가지런한 빗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 올의 머리카락도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들의 빈틈없고 빠듯한 성격을 익히 안다. 그런 매무새를 가진 동시대의 그녀들이 만들어낸 깔끔하고 완벽한 이미지 덕에 표정을 지운 채 성의 없이 반찬을 내려놓는 투박한 손길조차 이 일에 능숙한 이의 몸짓에서 나오는 무심한 경지라 여겨질 지경이다. 여자는 알지 못하는 부채감을 안긴 채 그녀의 흐름을 계속해서 눈으로 좇는다.


그 너머 구석진 곳엔 다소 초라한 행색의 한 남자가 있다. 누군가의 시선이 머물지 못하도록 오로지 먹는 행위 본연의 목적에만 충실한 모습이다. 옆에 놓인 뚜껑이 열린 소주병은 반쯤 비워졌다. 급하게 부어 출렁이는 잔을 연신 비워내고는 습관처럼 마른세수를 하며 퍼석한 얼굴을 매만진다. 고단함이 깊이 새겨진 얼굴이다. 뜨거운 국물을 삼키며 목울대가 한 번씩 울렁일 때마다 목까지 차오르는 설움까지 함께 삼키는 듯한 기분이 든다. 비 오는 날 남자가 국밥집을 찾는 것은 한 번씩 떠오르는 감정의 소요를 삼킬 수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다시금 시선을 들어 올리는 것을 느끼곤 나 역시 얼른 고개를 돌린다. 그의 외롭고 쓸쓸한 정서를 알 것만 같다.  


연애하던 시절부터 찾던 식당이다. 그리고 국밥은 사실 신랑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딱히 마땅한 메뉴가 생각나지 않을 때면 새삼스레 신랑을 배려하는 척하며 선심 쓰듯 함께 와준다. 예전엔 서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대화의 소재를 찾곤 했지만 이제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각자의 상념에 빠지는 일이 더 많아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이 오히려 좋다. 그런 최적의 여건 탓에 나는 속으로 더 많은 말을 하고 속으로 더 많은 글을 지으며 지내는 중이다.


국밥이라도 삼키며 감정을 누르는 타인 곁에서 오래 끓여낸 육수의 깊은 맛을 알지 못하는 나를 생각한다.


여전히 타인의 사소한 모습에 사연을 덧입히는 것이 일상인, 어김없이 비가 오고 비냄새가 나면 깊이 있는 것을 동경하며 그런 시늉이라도 하고픈 나는, 국밥의 깊이를 알지 못하면서 국밥을 먹고 비를 알지 못하면서 비 곁에 자주 앉아보며 그렇게. 여전히 그런 나로 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내 손이 단축키를 기억하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