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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Mar 29. 2023

화분 가져가신 분, 가져다 놓으세요.


죄송합니다. 손을 쓰기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너무도 측은한 눈빛을 보내며 그의 운명을 고했다. 이런 지경이 되기까지 전조증상이 있었을 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간 너무 무심했던 나를 질타하는 것만 같다. 제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나 봐요. 증상이 두드러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어요. 다른 이였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며 과하게 두 팔을 휘적이며 변명해 본다.   


투블럭은 그런 말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헤어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움직일 때마다 말갈기 같은 윗머리가 리듬을 타며 들썩인다. 의도치 않게 한없이 희망적인 모습의 그는 그렇지 못한 말을 전해야 하는 고통을 최선을 다해 표하고 있다.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고 뒷말을 늘여보는데 그의 의도적 행동이 무색하게 여전히 말갈기 같은 윗머리는 움직일 때마다 발랄하게 들썩인다.


이제 더 이상 힘이 없고 중심축도 많이 무너졌습니다. 수리보다는 새로 구입하는 것을 권해드릴게요. 최대한 예를 갖추듯 두 손을 가운데로 모은 자세다. 나도 흩어진 팔을 그러모아본다. 이렇게 정중해야 할 일인가 피식 웃음이 났지만 그간 내게 베푼 용이함을 생각해 본다면 그 정도의 조의는 필요하지 싶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야 하는 괴로운 심정을 온몸으로 표하던 서비스센터 직원은 묵념이라도 할 기세다.


세탁기가 고장이 났다. 얼마 전부터 타는 듯한 냄새가 나고 이물질이 남더니 급기야 어젠 헹굼 상태에서 에러가 나고 멈춰버렸다. 그 바람에 대용량의 빨래를 꺼내어 직접 손으로 나머지 작업을 해야 했다. 물을 머금어 축 늘어진 빨래를 빨간 고무대야에 담아 욕실로 옮겼다. 헹구고 짜내는 일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손아귀에 힘을 잔뜩 주고 비틀어 짜냈음에도 널린 빨래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널린 빨래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다시금 물을 짜내보지만 옷의 마감선을 타고 미끄러지듯 자꾸만 물이 흐른다. 감당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처럼. 조금 전까지 담담하게 내 손에 몸을 맡기던 그들은 이제야 내 시야를 벗어났다 싶은지 포개진 몸속에 숨어서 운다. 그와의 이별이 이제야 실감이 나나보다. 한 번 더 건들려다가 손을 거두고 돌아 나온다. 뚝뚝 물이 흘러 베란다가 흥건하다. 슬픔이 차고 넘치면 조금 비워지리라.


빨래들의 갑작스러운 동요 앞에 아무렇지 않은 나의 심사를 들킬까, 오히려 새로 맞이할 아이를 내심 기다리는 설렘을 알아챌까, 정도 없는 메마른 인간이라 뒷담화라도 할까 싶어 아까 서비스센터 직원의 표정을 흉내 내 본다. 눈을 이렇게 내렸었나. 손을 이렇게 포개었었나.


빨래를 힘겹게 하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럼에도 산책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건너편 아파트를 가로질러 가면 강변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 그곳은 보통 그냥 지나치는 길인데 그날따라 두 눈을 사로잡는 글이 붙어있다.


하얀 화분 가져가신 분, 가져다 놓으세요. 씨앗 뿌려뒀습니다. CCTV 확인했습니다.


양지바른 곳에 빈 화분이 해를 쬐고 있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었다. 무엇인가로 피어날 준비를 위해 해를 가득 채워놓는 듯해서 나쁘지 않았다. 설게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보기 좋았다. 그런 화분을 누군가 들고 간 모양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번쩍 안고 간 그이에겐 그저 빈 화분이었을지 모르지만 주인에겐 마음을 가득 담아 심어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타이핑하여 출력한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주인의 분노한 마음이 느껴진다. 한 걸음 간격으로 여러 장이 붙어 있다. 지나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말겠다는 결의가 느껴지는 간격이다. 봄을 잃어버린 허무함이 더해진 듯 하얀 종이가 맥없이 펄럭인다. 그는 과연 알았을까. 그가 가져간 것이 주인에겐 하나의 피어나는 계절이었음을. 알고 나면 다시 가져다 놓게 될까. 계절은 그저 지나면 그만이라며 모른 척 그저 지나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앞에서 조금 머물렀다. 그 앞으로 검은색 상복을 입은 두 여자가 지나간다. 모녀의 모습 같다. 귀 옆으로 흰색 핀을 꽂았다. 모든 것이 피어나는 봄날에도 한 편에선 사그라드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벚꽃이 분연히 날리는 모습이 누군가에겐 설레는 마음의 조각이지만 누군가에겐 떨궈지는 눈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은 여전히 피어나기도, 스러지기도 하는 계절이다.


하얀 화분 속 씨앗의 행방은 알 수가 없으나 그것은 이미 내게서 씨앗 문장이 되어 피어나는 중이다. 화분은 한없이 가벼운 것이지만, 그 속의 것은 가끔 이렇게 무거워서 이미 여러 곳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고 지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봄날에. 그럼에도 피어날 일이 더 많길 바라며.



# 그림 출처 : 꽃 그림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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