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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음 Jun 11. 2023

건망증

다 이렇게 나이들어 가는거지!

 이번에는 우산이 없었다. 여지없이 남편이 의심되었다. 깔끔하게 정리정돈 되어있는 것을 좋아해 물건에게 제자리를 꼭 마련해주는 나와는 달리 물건을 꺼낼 줄만 알고 넣을 줄은 모르는 남편. 또한 필요한 물건이 딱 그 위치에 없으면 짜증이 확 나는 나와는 달리 꺼낸 물건을 매번 제자리에 안 놓고 나중에 어딨는지 찾아대는 남편이다, 이에 남편으로 인해 갈 곳 잃은 물건을 제자리에 넣어준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우산이 어딨는지 묻는 내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자신은 결백하다는 남편의 답변이 돌아왔고 우산의 행방을 묻는 추궁은 아들 둘에게로 옮겨갔다. 결국 시간에 쫓겨 우산은 못 찾은 채 출근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집을 나서며 우산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파란색 3단 우산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선명한데 그게 다였다. 내가 누군가에게 받아온 것 같기는 한데 작년에 직장 동료의 퇴임 기념 선물로 받았었던가? 마구 뒤섞여있는 기억 속 어딘가를 잠깐 더듬어 보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행방이 묘연한 우산의 존재를 감쪽같이 잊은 채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기예보 속 비그림을 비웃기라도 하듯 생각보다 맑은 날씨 덕에 우산이 굳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집에 돌아와 가방 속 물건들을 이리저리 정리하던 중 파란 우산이 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나의 예상을 180도 뒤엎은 채, 사용 빈도가 상대적으로 적은 내 에코백 안에 고이 넣어져 있었다. 순간 머리가 띵~. 내 가방에 있었다는 것은 내가 언젠가 넣어놨다는 것, 그치만 그 언제가 언제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애꿎은 남편을 원망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빼꼼이 고개를 들었지만 민망함에 함구해버렸다.     


  다음 날 오후 한가로운 시간, 문득 뒤죽박죽된 옷장이 눈에 거슬려서 정리를 시작하였다. 각양각색의 겨울 하의가 모여있는 수납칸은 특히 내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를 하던 중 1차로 뜨악한 때는 초콜릿색 겨울 바지가 내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아! 나에게 이 바지가 있었구나!’ 생각지도 못하다 지인을 우연히 만난 것 같은 반가움에 여기까지는 기분이 비교적 산뜻했다. 그치만 완전 잊고 있었던, 아니 기억에도 전혀 없는 치마를 하나 더 발견했을 때는 ‘헉’하는 소리가 육성으로 터졌을 뿐 아니라 잠시 얼음으로 굳어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디자인이 예쁘고 안감 기모로 따뜻하기까지 해서 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다른 겨울 치마와 싱크로율 99%였기 때문이다. 왜 같은 것이 두 개나 있지? 도무지 기억에는 없었지만 안감을 만져보고서야 이해가 되는 듯 했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의 치마인지라 기모가 없는 봄․가을용 얇은 버전으로 하나 더 구입했으리라.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띵한, 말잇못(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상태였던 나는 며칠 전 후배와의 대화가 떠올라 곧 실소를 터뜨렸다. 일 처리가 빠릿하고 문제해결의 아이디어를 곧잘 내는, 우리 사이에서 ‘브레인’으로 불리던 후배였다. 처음 보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모습에 옷 새로 샀냐며 예쁘다고 말해 주었는데 왠지 후배의 표정이 애매모호했다. 뭔가 중요한 말을 감추고 있는 듯한 모습에 자초지종을 캐물은 결과는 꽤 놀라웠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망설임 없이 구매한 원피스를 어제 택배로 받아보았다고 했다. 입은 옷태마저도 만족스러워 흡족한 마음으로 옷장을 열고 옷걸이에 걸려던 찰나 아연실색하게 된 후배. 그 이유는 완전 같은 옷이 이미 옷장 옷걸이에 떡 하니 걸려있었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가장 나이도 어린 네가 벌써 그리 기억이 가물가물하면 어쩌니’ 하며 걱정 반 놀림 반의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후배는 코로나 확진 후 건망증이 더 심해진 것 같다며 조심스레 코로나 탓을 했고 나는 나이 마흔에 들어서서 그렇다며 노화를 탓했었다. 그런데 후배의 어이없는 실수에 재밌어하던 내가, 아니 더 솔직히 말해 ‘난 저 정도는 아니지’ 하며 자기 위안을 했었던 내가 거의 비슷한 일을 저질렀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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