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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아 Aug 15. 2022

중고신입 이직, 후회일까 기회일까

경력을 포기하면서 얻은 것.

첫 취준을 하면서 어문학과라는 단일 전공 학위로 이곳저곳을 다 지원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합격한 곳은 어느 대기업의 경영지원 직무.

인사나 교육 직무가 포함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본사 근무하는 사람들을 다 '경영지원'직무로 뽑은 거였다.


사령식 날이 되어서야 내 직무를 알 수 있었는데, 내가 배치된 곳은

SCM팀 S&OP담당


사령장을 받고도 S&OP가 뭐야?라는 생각에 경악을 금치 못하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것이 내 SCM커리어의 첫 시작이었다.





첫 직장에서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SCM직무를 온몸으로 익혔다.


SCM의 S도 배운 적이 없어서 모든 것이 다 낯설었고, 낯선 만큼 배우는 재미도 쏠쏠했다.

제품들을 다 익히고 나니 제품의 생산부터 공급까지 내가 직접 컨트롤해야 했고, 일에 대한 주도권이 주어지는 만큼 내 일에 대한 자기 효능감, 만족감도 높아졌다.


하지만 '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일까, 

한 직장에서 2년이 넘게 근무하면서 무역, 물류 자격증 2개를 땄고, 온몸으로 경험을 하고 나니 슬슬 더 큰 회사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B2C회사 물류팀이라면 피할 수 없는 감정노동의 힘듦과 왠지 지금 아니면 또 옮길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은 덤이었다.


경력직 이직을 찾아보니 모두 요구하는 기간은 5~8년 정도였다. 지금 옮기려면 신입 채용밖에 없었다.

마침 더 큰 회사의 SCM 직무 채용 공고가 떠서, '되면 좋고 아님 말지 뭐'의 마음가짐으로 냅다 지원하고 말았다. 




경력, 안 아깝냐고?


솔직히, 아깝다. 어떻게 안 아까울 수가 있을까? 2년을 넘게 일했는데.

목전에 대리 진급을 두고 퇴사를 했음은 물론, SCM이 아닌 타 직군은 2년+a의 경력직도 많아서 나와 비슷한 연차의 사람들이 경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연차 역시 다시 1년 차가 되어 신입으로서 일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도 스트레스였다.

전 회사 대리 연봉이나 지금 회사의 초봉이 비슷한 수준이라는 게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되었지만, 마치 지난 2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한 느낌을 피할 순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일을 하면서 깨달은 건, 중고 신입이라고 해서 내가 일했던 경험이 '제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마침 옮긴 회사가 경력직 유입이 많은 시기여서, 일을 다 같이 재배분하고 함께 배워나가야 하는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곳이 첫 회사인 친구들과, 실무를 하다 온 나의 출발점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도 회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랐다.

신입으로 들어왔지만, 나를 신입으로 바라보고 가르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기존에 관련된 경험이 있어서 일에 적응하는 것도, 일을 하는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새롭고 많은 일을 단기간 내에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이렇게 다시 시작하게 해 줄 수 있었던 건,

이곳이 마지막이 아닌 내가 성장해가는 과정 속에서 잠시 머무는 회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같은 직무로 옮겼지만 더 큰 회사에서, 더 큰 시스템을 관리해보니 분명 전에는 알 수 없던 것들을 배울 때가 많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환경이 달라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직장 내에서의 안주점인 comfort zone에서 스스로 벗어나, 나의 단점을 보완하고 극복하는 새로운 시도들을 분명 해나가고 있다.


차후 이직 때에도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더 큰 회사에서의 이 경험이 어쨌든 내 인생에서 하나의 기회인 것 같기도 하다.



후회가 남지 않는 선택이 될 수 있도록


대학생 2~3학년쯤이었을 때, 그냥 재수할걸 그랬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결코 이름 없는 대학이 아닌 그래도 꽤 노력해야 다닐 수 있는 상위권 인서울 대학이었지만 스스로 아쉬운 감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재수는 죽어도 싫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길게 보니 아니었다. 길게 보면 우리 인생에서 더 큰 것을 위한 투자인 것을 감안하면, 스무 살의 1년 정도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이번 이직도 그렇다. 이 선택의 진가는 지금 알 수 없다. 일하다 지치는 날엔 "그냥 대리 달고 옮기지 말걸 그랬어"하는 작은 푸념을 하는 날들도 있고, 또 어떤 날엔 "그래 역시 옮기길 잘했어" 하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날들도 있다. 


이 선택이 어느 목적지로 나를 데려갈지는 모르지만, 나는 분명 성장하고 있고,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직장인이 아닌 탑티어 여러 곳에 몸담궈본 '경험 많은 직업인'이 되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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