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은 인수인계는 곧장 손을 떼는 것이다.
입사 후 우리 담당이 워크샵으로 가는 길 안에서 대리님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 나에게 물었다.
"세아야, OOO 제품 지금 생산공장에 재고 있어?"
업무를 받긴 했지만, 한 달 남짓이었던 내게 제품의 재고 수준까지 머리에 입력하는 것은 조금 버거우면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 내가 맡고 있는 일이었지만 내가 담당자라고 하기엔 아직 낯선, 그런 단계를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나에게 업무를 가르쳐 준 그 순간부터 대리님이 받는 모든 전화의 끝 마디는
"이제 제가 담당자 아니에요."였다.
내가 넘겨받은 가장 메인업무는 외주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수급을 담당하는 업무였다.
판매를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제품의 재고를 유지하고, 공급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외주공장은 20개 가까이 되었고, 외주공장에서 생산하는 SKU만 100개는 족히 넘었다. '재고를 유지한다'라는 것에 역시 많은 의미가 있었다. 현재의 재고 수준은 물론, 이번 달의 판매 목표를 파악하고, 매일의 달성률을 체크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그 달의 행사계획을 알아야 했다- 다음 생산계획은 언제가 좋을지 픽스해야 하고, 무리 없는 일정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지 알아야 함을 뜻했다.
재고가 너무 많아서도 안 됐다. 재고는 어쨌든 회사의 비용이기도 했고, 식품은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에 왕창 생산하여 날짜가 너무 많이 지나가 버릴 경우에는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악성 장기재고가 될 수 있다.
이 많은 것을 인수인계를 받는 순간 모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극적 이게도 나는 어문을 단일 전공한 병아리 사회 초년생이었고, SCM이나 수급업무는 이론으로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저 담당자 아니에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대리님이 야속하기도 했다. 누군가 전화가 와서 행사를 진행해도 되는지, 어떤 제품이 부족한데 언제 생산 일정이 있는지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수 없었고, 작은 의사결정에도 나만의 기준이 없으니 다시 대리님에게 들고 가 물어보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이제 담당자 아니에요."라는 대리님의 한 마디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담당자. 이 일에 있어서는 제일 잘 아는 사람.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그런 단계가 아니었기에, 이 한 단어는 나를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하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대리님께 안건을 들고 가 상의했지만, 대리님은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이제 제가 담당자가 아니라서 세아한테 물어보세요'라고 응대했고, 사람들은 나에게 올 수밖에 없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먼저 찾아오기 시작했고, 나는 생산계획이나 판매 수준을 매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유관부서와 상의하며 데이터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머리에 더 많이 남게 되었다.
SKU 개수에 압도당하고, 간단한 원리 설명 후에 던져졌던 날들은 점점 더 과거가 되어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지금 챙겨야 하는 중요한' 제품들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제품의 생산 날짜가 머릿속에 저장되어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면서도, 어딘가로 이동을 하면서도, 갑작스러운 상사의 질문에도(이건 좀 당황하긴 했지만) 점점 자신감 있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헷갈리고 모르겠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 일을 해봤던 선배들에게 주저 없이 물어봤다. 내가 이렇게 질문을 많이 하고, 또 질문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무관심해 보이지만 다들 이 업무를 해봤기 때문에 고민스러운 부분에 있어 답을 줄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만약 그 당시에 대리님이 그렇게 손을 떼버리지 않고 계속 모든 사람을 상대해 주었다면, 어쩌면 유관부서 사람들은 나를 담당자로 인정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를 찾는 사람이 없고, 결과적으로 나도 더디게 성장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최고의 인수인계 방법은 당장 손을 떼어버리는 게 아닐까. 대신 업무를 해주지 않아도, 옆에서 지켜봐 주고 어려운 질문에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스로 자라날 힘을 얻게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