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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May 23. 2023

이탈리아 르네상스 트릴로지 (1편)

서양미술사의 계보 #7

일반적인 미술 양식사에서 르네상스 시대는 14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사조다. 중세 미술의 초현실적인 양식에의 반작용인 듯 마치 고전 시대의 예술이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등장하는 르네상스 미술은 인간과 자연의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인간 정신, 곧 휴머니즘의 부활을 시도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를 데 없는 대성공. 르네상스인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이 이룩했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다시금 부흥시키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르네상스는 중세 시대를 지배한 신(神) 중심의 정신적인 가치관으로부터 다시 한번 인간 중심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문예 부흥 운동이었다. 그 시발을 예고하는 분기점은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이 숨죽이고 있었던 이탈리아 반도로부터 발아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반도는 당시 유럽에서 도시 국가가 가장 발달했던 지역이었다. 각 도시의 귀족과 상인들은 금융업과 상업에 기반한 부유한 도시민으로서 문화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그리스를 계승한 로마 제국의 본토가 바로 이탈리아였기에 고전 유물과 문헌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 또한 플라톤 철학과 고대의 신비주의를 기독교와 혼합하려 한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곳도 바로 이탈리아였다. 이처럼 르네상스가 꽃필 수 있는 모든 토양을 갖춘 이탈리아에서 향후 수 세기를 지배할 미술이 ‘재생’하게 된다. 전설의 시작


중세인듯 중세아닌 중세같은, 조토

고딕 시대 말엽 혹은 르네상스 전기에 조토 디 본도네(c. 1267-1337)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화가 겸 건축가인 조토는 발음주의 유럽 회화의 흐름을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격변시킨 혁신의 주인공이었다.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1909-2001)는 13-14세기에 걸쳐 활약한 조토에 대해 "미술사를 다룬 문헌에서는 조토와 더불어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표현했다. 조토의 미술사적 업적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 평면 화폭에 입체 효과를 구현했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동시대인 13세기에 그려졌던 작붕쩌는 다른 회화 작품들과 비교해 보자.


성 프란치스코의 대가, 〈그리스도를 애도함〉(두폭제단화 부분), c. 1272, 목판에 금과 안료, 페루자 움브리아국립미술관.


위의 작품은 조토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익명의 화가 성 프란치스코의 대가(13세기?)가 제작한 두폭제단화의 〈그리스도를 애도함〉 부분이다. 일단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은 성흔을 입은 채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겼으나, 이를 둘러싼 애도자들의 도식화된 무표정은 그닥 비통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나마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분을 홍조의 유무를 시도한 건 비교적 인상적이긴 한데, 그보다는 어떻게든 자신의 얼굴 정면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같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 연출된다. 일단 배경부터가 환상적인 금빛으로 현실이 아닌 이상적인 공간을 형상하며 원근감이나 양감의 표현에 따른 깊이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평면 위에 평면을 충실히 구현한 이 작품은 화가의 실력이 떨어진다기보다는 비잔틴 전통의 성상화 제작 양식을 충실히 구현한 것으로,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모방보다 작품 속 성인들의 상징을 모조리 담아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물론 작붕은 쩐다


이런 그림들이 주로 제작됐던 시기에 조토가 등장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토는 평면의 화폭에 입체적 깊이감을 부여했다. 2D 상에 3D 같은 착시를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원근감, 쉽게 말해 가까이 있는 것은 크고 또렷하게, 멀리 있는 것은 작고 흐릿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원근감의 표현은 고대의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의 회화에도 원시적인 형태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정확한 표현기법으로서 수학적으로 정립된 원근법이 사용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부터였다. 조토는 아직 기법으로서는 아니지만 그림에 원근감을 부여해 깊이를 더하며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예고편을 깔아줬다. 이와 같은 조토의 명성은 동시대의 문학가이며 『신곡』의 저자로 유명한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가 당시 피렌체화파의 거장이자 조토의 스승이었던 치마부에(c. 1240-1302)와 조토를 비교하며 후자의 명성에 전자의 그림자가 지워졌다고 평했다. (심지어 이것을 『신곡』에 언급해 둔 단테 당신은 도대체)


조토 디 본도네, 〈그리스도를 애도함〉, 1300년대, 프레스코, 파도바 스크로베니예배당.


조토의 회화를 집대성한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화가의 작품 세계를 오롯이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소우주와 같은 장소이다. 상인 엔리코 스크로베니는 가문의 예배당을 구축하며 조토에게 예배당 내부 벽화를 의뢰했다. 이에 조토는 젖은 회반죽으로 초벌칠한 벽면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하는 습식 프레스코(부온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해 성서의 내러티브와 인물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했다. 앞서 살펴본 성 프란치스코의 대가와 동일한 주제인 〈그리스도를 애도함〉을 조토가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벽화에 구현한 결과를 살펴보자. 고도로 완성된 시각적 환상에 익숙한 우리 현대인들의 눈에는 그저 그런 14세기의 어쩔티비 벽화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탈리아식 비잔틴 화풍에 익숙했던 1300년대 초반의 수용자들에게 조토의 화폭은 혁신 그 자체였다. 원경과 근경이 구획된 화면 속의 인물들은 천편일률적인 크기에서 벗어나 서로 간에 설정된 공간 개념을 형성하며 공간감과 깊이감을 부여하는데 일조한다. 물론 그림 속 성인들은 여전히 머리에 휘광을 발하고, 부분적으로 마구 중첩된 중세 회화의 전통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요컨대 지오토의 화풍은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의 교집합인 셈이다.


피렌체의 영광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피렌체 공화국은 예술 후원의 대명사 메디치 가문이 다스리는 아름다움과 광기가 한 솥에서 끓어 넘치는 도시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는 메디치 가의 영광이 절정에 달한 때였다. (물론 중간에 피렌체에서 추방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함 사보나롤라의 악몽) 상업과 금융으로 부유해진 도시 중 하나였던 피렌체는 메디치 가의 세습 지배와 예술에 대한 후원 아래 초기 르네상스 미술을, 그야말로 꽃피워냈다. 초기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예술가로는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 초기 르네상스의 창시자 마사초, 아름다운 여신들의 화가 보티첼리 등이 있다. 이들은 조각 분야에서는 고전 조각의 정신을 부활시켰고, 회화에서는 비잔틴 전통의 종교적 상징으로부터 탈출했다. 요컨대 자연주의적이며 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한 것이다.


도나텔로, 〈다비드〉, c. 1440, 청동, 158cm (높이), 파렌체 바르젤로국립미술관 (사진: Rufus46)

 

도나텔로(c. 1386-1466)의 끝내주는 대표작 〈다비드〉(c. 1440)는 고대 로마 제국 이후 천 년 동안 이어진 중세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깨고 다시 등장한 실물 크기의 누드 조각상이다. 피렌체 공화국의 ‘국부(國父)’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1389-1464)가 주문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비드〉는 피렌체가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다윗(=다비드)은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구약최고의 영웅인만큼 전쟁에서 승리한 사건을 칭송하고 시민들의 사기를 높이기에 이만한 기념물도 없었을 것이다. 골리앗의 버리를 밟고 짝다리를 한 다윗의 자세는 도나텔로가 재발견한 고대 그리스식 인체의 자연스러움, 곧 콘트라포스토 개념을 충실히 반영했다. 또한 다윗은 위대한 영웅임에도 우락부락한 남성이 아니라 소년의 몸매로 묘사돼 도나텔로가 추구한 사실주의적 표현을 드러낸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총애한 미소년 안티누스의 조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카더라도 있다.)


마사초, 〈성삼위일체〉, c. 1426-1428, 프레스코,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본격적인 창시자로 불리는 마사초(1401-1428/9)는 중세 말기 ‘르네상스 예고편’을 틀어준 조토의 조형 전통을 계승해 그림 속 인물을 실제 사람처럼 표현했고, 도나텔로의 사실주의와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의 영향력 속에 회회 양식을 확립했다. 당시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3D의 감각을 갖춘 마사초의 끝내주는 대표작 〈성삼위일체〉(c. 1426-1428)는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그 '수도원 화장품' 브랜드가 탄생한 그곳 맞다)의 내부 프레스코화로, 위대한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해 낸 수학 법칙에 근거한 일점 원근투시법에 의거, 정교하게 고안된 소실점 계산을 통해 깊은 벽감을 판 것만 같은 눈속임 효과(trompe-l'œil, 필자의 전공 맞다 마사초 숭배의 이유)를 자아낸다. 진정한 르네상스 미술의 시발이라 할 만한 〈성삼위일체〉는 최상단의 신(神, 성부)과 흰 비둘기(성령),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성자)를 주축으로 삼아 양측에 배치된 성모 마리마 및 세례자 요한, 그리고 작품의 주문자로 추정되는 두 남녀(아마도 렌지 가문)가 완벽한 피라미드 구도를 이룬다. 두 성인들은 중세의 초현실적인 인물이 아니라 거의 실제 인간처럼 묘사됐는데(피부에 시도된 명암법을 보라), 그래도 아직은 머리를 후광으로 장식하고 성령의 비둘기와 같은 초현실적 종교적 도상을 활용하는 등 중세 미술의 특징이 남아있기는 하다. (아직은 초기니까)


마사초의 〈성삼위일체〉에서 가장 인상적임에도 자주 간과되는 부분이 최하단의 해골과 석관 파트이다.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와 신성한 성인들 아래, 오랜 원죄에 기인해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 아래, 죽음의 역사적 도상에 해당하는 해골과 석관 이미지는 겸허히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메멘토 모리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부패한 해골 위의 비문 역시 그렇다. "IO FUI GIA CHE VOI SIETE E QUEL CH'IO SONO VOI ANCO SARETE"(나의 어제는 그대의 오늘이고 나의 오늘은 그대의 내일이다. 너 죽는다) 마사초의 생몰년에 나타나듯 이 화가는 창창한 20대에 단명한 축이라 특정 시기에 집중된 작품들이 현전하는데, 그의 성숙해진 후기 작품들을 더 볼 수 없음이 몹시 애통하다. 만약 마사초가 더 오래 살았다면 트롱프뢰유 장르의 전성기는 17세기가 아닌 15세기로 200년 가까이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럼 난 마사초로 석사논문을 썼으려나


산드로 보티첼리, 〈팔라스 아테나와 켄타우로스〉, c. 1482, 캔버스에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그리고 산드로 보티첼리(c. 1445-1510)가 등장하는데, 사실 이쯤 되면 더 이상 르네상스 초기라고 말하기도 미안한 지경이다.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다수 제작한 보티첼리는 당대에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의 크나큰 사랑을 받고 있는 초기 르네상스인일터. 자연의 세부적인 모습을 아름답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장기를 지닌 보티첼리는 특히 특히 여성의 누드를 그리는데 능숙한 아름다운 여신들의 화가였다. 물론 기독교에 입각한 작품도 많이 제작했는데 보티첼리의 성모님은 유난히 아름다우시다, 그래도 보티첼리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대표작들은 주로 인간의 형상으로 묘사된 고대 여신들을 통해 그리스·로마 신화의 부활을 선언하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르네상스 정신의 발로이다. 피렌체 우피치미술관이 소장한 보티첼리의 〈팔라스 아테나와 켄타우로스〉(c. 1482)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만한 작품인데, '일 마니피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주문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보티첼리가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던 황금기에 제작된 〈팔라스 아테나와 켄타우로스〉는 미늘창(할버드)을 든 위풍당당한 여성에게 머리채를 잡힌 반인반수(半人半獸) 켄타우로스의 형상을 묘사했다.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둥근 고리 문양의 드레스를 입고 로렌초라는 이름의 언어유희인 월계관(láurĕa)으로 머리를 장식한 여인은 그리스 신화 속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로마의 미네르바)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등장하는 여전사이자 사냥꾼공주 투희속성 카밀라 혹은 피렌체 공화국을 의인화 플로렌시아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피렌체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편 이성(여신)이 본능(반인반수)을 통제하는 시대에의 은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족을 더하자면 가끔 이런 의문을 갖는 이들이 있는데, 아무리 중세가 막을 내리고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해도 당시 유럽은 카톨릭이 굳건히 지배하던 곳일터. 그런데 감히 이도교의 누드 여신을? 당장 마녀사냥을 당해 화형에 처해져야 했던 것 아닌가... 싶을 수도 있는데, 전술했듯 당대에는 피렌체를 포함한 이탈리에 전역에서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크게 유행했고 특히 위대한 로렌초(로렌초 데 메디치 '일 마니피코')는 인문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의 고전 철학과 히브리 사상 등 고대의 신비주의를 기독교와 혼합하는 결과는 낳았고, 이에 따라 당대의 르네상스인들은 이도교의 신을 묘사한 보티첼리의 회화에서 다양한 상징들을 해석하며 흥미를 느꼈을 공산이 크다.


참고문헌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13.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김호경 옮김. 예경북스, 2010.

H.W. 잰슨, A.F. 잰슨. 『서양미술사』. 최기득 옮김. 미진사, 2001.



미술사 연구는 오늘날의 수많은 학자들만큼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현재 진행형의 영역에 놓여 있다. 특정한 예술품이 만들어진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이상 절대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미술사학 역시 부단한 연구와 사례 분석을 통해 시간의 베일에 가려진 진실에 근접하고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가장 타당한 해석을 찾아갈 따름이니까. 그러니 의견의 방향이 다르다고 맹렬한 비난을 하시면 아마 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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