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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Jun 22. 2023

로마 유리기 복구 작업

런던의 업장에서 이성을 잃다

런던 업장 2주 차의 첫날, 드디어 두통 재발.


오이 채칼이 없어서 형태가 엉망이나 맛은 괜찮음.


만성두통의 권위자임. 런던 업장의 출근 2주 차의 첫날 드디어 짜증스럽게도 두통이 시작. 우측 편두가 뭉근하게 쑤시는데 보통 감기몸살의 전초 증상임. 일단 에드빌로 눌러보고 안 잡히면 렘십이라도 미리 사서 먹어둘 계획.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뭐라도 먹어야 진통제를 먹을 수 있으니. 호밀빵에 오이+치즈, 버터+라벤더꿀을 각각 올리고 라임은 무조건 곁들임. 막스앤스펜서 드립백 커피가 영 별로라서 어쩔까 생각했는데, 보스2가 네스프레소 버추오 사줘서 약간 고마웠음. 이틀 후 도착한다고.


업장 앞에서 담타 중인 인턴들.


역시나 닫혀있는 업장 출입문. 결코 일찍 오는 법이 없는 보스1. 두 인턴들이 어찌나 즐겁게 담타를 하는지 하마터면 동참할 뻔함. 보스2가 새 업장 유리창에 로고 레터링 시트지 작업을 오늘 할 거라고 함. 그럼 좀 빨리 오지 어휴. 작업자에게 설명할 레터링 위치를 표시해서 보스2와 논의함.


히에로글리프 파파고 노예된 썰푼다 1


또 30분 지각한 보스1. 부들부들. 늦은 주제에 묘하게 들뜬 보스1이 급히 나를 불러대서 가보니 이걸 좀 봐봐- 당장 읽어봐- 시전. 저는 히에로글리프 파파고가 아닙니다. 각 잡고 읽어도 최소 1달 걸리는 작업을 지금 당장 해보라니. 시간 걸려. 엄청나게. 대충 응수하고 하던 작업으로 돌아가려는데,


히에로글리프 파파고 노예된 썰푼다 2


이것도 있어! 너 서울에 있을 때 내가 사진을 보여줬지? 실제로 보니까 어때?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 준 거지? ㅇㅈㄹ. 더럽게 행복하군. 그래도 이건 문자가 크고 선명한 데다가 도서관과 기록물의 여신 세스헤트의 도상 및 주제가 너무 명백해서 해석이 어렵지는 않았음. 이 정도는 그 자리에서 해드림. 덕분에 잠시 후 대참사가 일어남.


히에로글리프 파파고 노예된 썰푼다 3


우왕 이것도 읽어봐! 하... 그만 좀 해 진짜. 지금 슈퍼 비지하니까 순차 살펴보겠다고 약속하고 파파고의 굴레에서 간신히 풀려남. 도와줘요 유 박사님. 일단 한국에 계신 전문가 분께 sos 치고 빠짐.


갤러리 내부의 전경.


1층 쇼룸 DP가 엉망인 상황이라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는 중. 작업자들이 내부 작업이라도 하는 날에는 하도 긴장 상태라 온몸이 다 쑤심.


시트지 레터링 작업 중


보스2의 고집으로 레터링 디자인은 서울 업장의 인하우스 격인 디자이너가 담당. 시차를 넘나들며 디자인 회의가 계속됨. 나 언제 자라는 거야 진짜. 로고디자인은 규격 양식으로 통일이지만 문제는 색상인데 보스2가 이 부분에 예민해서 죽을 맛이었음. 그래도 결과물이 꽤 만족스럽게 나와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다행.


로마 유리기 A의 처참한 모습 1


로고 레터링 작업 마무리. 지난주에 한참 정리했던 지하층 중국 및 아시아 유물 섹션으로 다시 돌아옴. DB 작업으로 막 들어갔는데 업장의 시설 관리 전반을 담당하는 기사님 C(아랍계 영국인)가 정체 모를 박스를 덜그럭거리며 가져옴. 뭔데? 내부의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서 좀 열어봅시다- 했더니, ㅅㅂ!!!!!


로마 유리기 A의 처참한 모습 2


서울 업장에서는 쉽게 이성을 잃는 편이라 런던에서는 그러지 않으려 했음. 화내지 말고 욕 하지 말고 가급적 언짢은 티도 내지 말자, 런던 스탭들에게 친절한 모습으로 체면치례는 해둬야 후일 서울 업장도 인력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이건 내 상식의 선을 한참 벗어났음.


로마 유리기 A의 기단부와 주두부


한눈에 보기에도 두 종 이상의 유리기 파편이 한 곳에 뒤섞인 상황. 나도 모르게 ㅆㅂ-이라고 한 모양. 어시 연구원 S가 냉큼 알아듣고는 나 그거 알아 한국 욕이잖아- 하고 반가워함(?). S야 제발 분위기 파악 좀. 대체 어떤 딮플리 크레이지한 휴먼이 이렇게 패뷸러스한 카타스트로피를 만들어 놓은 것인지 C와 S를 추궁. 둘 다 모른다고 오리발. 하.


로마 유리기 A의 주두부


현 업장에서 유물용 고무고무 핀셋을 찾는 건 불가능. 다만 한국에서 가져온 개인 물건 중에 중성지 테잎과 초박형 니트릴 장갑이 지금 내 가방에 있기는 함. 이걸 해, 말아, 고민하다가 도저히 신경 쓰여서 참을 수가 없었음. 결국 점심시간 반납하고 유리편 작업. 내가 내 무덤을 팠음.


기단부와 주두부 고정


예전에 대학박물관에서 조선 청화백자의 도편 복구는 해봤지만 그건 경도가 높은 도자기 편인 데다 파편의 크기도 컸음. 이건 로마제국기의 작은 유리병임. 고대 로마의 유리편은 기벽이 얇고 경도가 떨어져 손으로 주무르다가 부스러트리기 딱 좋은 소재. 손 다치는 건 덤.


기단부와 주두부 결합.


로마 유리기 A는 주두부의 곡선 장식으로 하부의 기단부보다 상부가 무거움. 거꾸로 놓고 작업하는 편이 안전. 기단부와 주두부를 따로 작업하다가 결합. 고무 핀셋이 절실. 떨리는 손을 진정하고자 매우 노력.


소실된 부분과 세밀파손부가 너무 심각한 로마 유리기 A.


중성테잎으로 한 편 한 편 연결했을 뿐인데도 기특하게 고정된 로마 유리기 A. 다만 10% 정도는 세밀파손에 소실부가 심각한 상황. 보스1이 급 와서는 우왕우왕 접착제 안 필요해? ㅇㅈㄹ. 핀셋 없이 접착제 쓰면 진정한 대참사가 벌어짐. 저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밀작업이 가능한 도구 없이 접착제 못 쓴다고 핀잔을 준 뒤 쫓아냄.


유리기 A의 파편으로부터 간신히 구분한 유리기 B 파편.

박스 안에 섞여있던 유리기 종류는 단 2점뿐. 색상은 유사하지만 기벽 두께가 비교적 차별되는 편이라 불행 중 다행임. 그래도 나의 빡침을 달랠 수는 없음. 유리기 B 파편을 따로 모아서 복구 작업 시작.


이렇게 예쁜 유리기를 대체 누가 그랬냐고!


로마 유리기 B는 주두에 손잡이가 3개 달린 귀염상.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기형. 기벽이 비교적 도톰한 편이라 유리기 A보다는 복구가 수월하지만 문제를 따로 있음.


비어있는 소실 부분. 오열.


유리기 B의 경우 소실된 파편이 있음. 추측컨대 비전문가가 유리기 두 점을 이동하다가 깨뜨리고는 한 데 쓸어 담아버린 듯. 와 씨 진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고. 이 업장의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


참고로 모자이크 부분이 업장 로고임.


퇴근하며 업장 밖에서 찍은 내부 전경. 로고 레터링이 제법 그럴듯했음. (모자이크된 부분임) 브라운톤이 아주 잘 빠져서 너도나도 만족도 높음. 서울의 디자이너 샘 고마워요. 당분간은 괴롭히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당분간은.


귀차니즘 환자의 그리스식(?) 식단.


점심 거르고 진통제는 계속 먹었더니 온몸이 너덜거리는 기분. 이대로는 몸살 확정인지라 퇴근길에 있는 부츠에서 감기차 렘십과 종합감기약으로 추정되는 알약, 그리고 물 타 먹는 비타민C를 구매. 카운터의 약사가 감기냐? 묻더니 두 종 같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함. 최소 1시간 텀을 두고 섭취하기로 약속. 그리고 떨리는 다리를 다독이며 막스앤스펜서에서 올리브오일과 민트코코아 충동구매. 오늘 저녁은 사과와 수란을 곁들인 그리스식 샐러드. 빨리 먹고 약 먹고 누워야 함.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사진·본문 불펌은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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