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가 하나도 맞지 않아서 그런가.
대학교 3학년 나는 부전공은 아니지만 학교 내의 연계 프로그램으로 경영학부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당시 들었던 과목 중의 하나가 'Human Behaviour in Organization' 단체에서의 인간 행동과 심리에 초점을 둔 수업이었다. 수업의 두꺼운 책에서 서론을 여는 첫 번째 과목은 인간의 성격을 테스트하고 분류하는 다양한 검사 종류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MBTI를 보고 신이 났었다. 정식 테스트까지 했던 터라 잔뜩 기대하고 수업에 갔지만 교수님은 거두절미하시고 MBTI는 수업에서 빼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유인즉 세상의 어떤 성격 검사보다 신빙성이 떨어지고 신뢰도 낮은 테스트이기 때문이라 하셨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MBTI열풍이 몇 년째 끝나지 않고 있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는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말을 하며 어색함을 깨보려 노력한다. 얼마 전 참여한 기업 면접에서도 장시간의 대기에 지친 나와 대기자들은 서로의 첫인상만으로 MBTI를 맞추며 무거운 공기를 순환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MBTI를 좋아한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정식 시험지로 진행한 MBTI 테스트를 했었다. 12년도 더 지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터넷 테스트로도 ENTJ가 나온다. 사실 ENTJ는 어디서 환영받는 MBTI는 아니다. 내가 봐도 너무 드세다.
하늘 모르고 치솟는 자존감, 학창 시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반장 부반장 회장 전교회장 안 해본 학기가 없는 경험담, 타 전공 수업도 100점에 목숨을 걸고, 빠르게 진행되는 변화라면 더 빠르게 해결한다. 인간관계 또한 철저하게. 항상 나은 관계와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인생을 도장깨기 하며 살아온 버릇이 너무 익숙해져만 갔다. 그러던 내가 푹 빠진 사람은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ISFP의 사람. MBTI의 4가지 분류 중 단 한 가지도 나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편은 내 주변의 어떤 사람보다 과묵한 사람이었다. 연애할 때도 감동적이거나 낭만적인 말을 하지도 않았다. 지키지 못할 약속 따위는 입에 담지도 않는다. 오로지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큰 야망이나 욕구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가끔가다 EDM 페스티벌이나 클럽에 나를 데려가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여주면 또 어찌나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항상 주변인들에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공부라는 걸 즐기지 않았고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저 친구들과 농구를 열심히 하고 싶은 게 소원이라는 단순한 사람이다. (나는 대학 계획부터 다시 세운다고 말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비교하면 너무 달라서 신기할 정도다.
- 청소시간: 나는 청소하지 않는 친구들의 이름을 칠판에 적고 있었고 그는 빗자루 싸움을 하다 몰래 도망가는 사람이다.
- 쉬는 시간: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시험에 대해 얘기할 때 그는 뛰쳐나가 농구만 했다.
- 공부: 1등이 목표 100점은 필수였던 나와 반대로 그의 목표는 올해 지역 농구대회 1등 마라톤 경기 나가기 끝! (그는 체육인이 아니다. 지금의 직업과도 관련이 없다.)
- 시험기간: 이미 나의 공부는 계획한 대로 끝이 났다. 복습 한 번씩만 더하고 컨디션 조절을 위해 잠을 청한 나와 막판에 박차를 가하는 '시험기간 도서관의 요정'이 되는 남편!
- 수상: 나는 상장 컬렉터였다. 보이는 족족 입상 및 수상에 목숨 걸었고 메달과 상장으로 박스를 채워갔다. 반대로 그의 유일한 상장은 매년 '개근상'. 최근에 동시 짓기 상장을 발견해서 그 자신도 놀라워했다.
우리의 맛집 데이트도 각자의 포인트가 굉장히 다르다.
나는 그동안 간 곳들의 음식을 비교하고 가게 내부의 개선할 점과 마음에 드는 점들을 비교하느라 바쁘다. 직업 특성일지도 모르지만 디자인과 분위기는 항상 평가 대상이다. 반대로 그는 가게 내부와 외부의 손님들을 관찰하느라 바쁘다. 주로 내 평가를 들어주며 사람들을 관찰하다 재밌는 요소를 전달해주는 식이다.
서로가 달라서 재밌는 만큼 문제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서 힘이 들 때도 많다.
계획 없이 돌아가는 상황들과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과정은 나에게 너무 힘이 든다.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모든 과정에 이유와 판단을 말해주길 기다린다. 귀찮고 피곤할 정로도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해야 한다. 반면에 그는 즉흥적인 것에도 크게 불만이 없고 어떤 계획을 세워서 하는 일이 힘들다. 한 번 마음먹으면 오히려 나에 비해 더 큰 열정을 투자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문제가 일어나도 전체적인 틀 하나로 보길 원한다.
다툼이라는게 일어나기도 힘들다. 나는 문제의 문제를 찾고 있고 그는 문제를 넘기고 싶어한다. 애초에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 나중에는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겠더라. 이렇게 보면 별거 아닌거 같은데 저렇게 보면 큰 문제 같아져 버리니까 답이 안나온다.
그렇지만 서로는 서로를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서로의 차이는 맞고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그를 통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정말로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조금 속도를 늦추면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고 감사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게 더 멋지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포장하는 것보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안 쓰고 솔직한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일 때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통해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가끔은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불만을 표현을 하는 것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빠른 판단과 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해보고 싶고 잘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금은 속도를 내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에게 끌린다. 축복일 수도 있다. 같이 있으면 재밌고 답답하다. 이룬 것 하나 없이 가난하기도 평범한 것 같기도 한 우리를 보며 짠내 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한다. 나는 그를 만나고 인생의 많은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수 있었고 결과는 좋았다. 그리고 항상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살아간다. 확실히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가는 부부는 아니다. 그보다 돈을 버는 목적과 상대방의 현재 상태, 상대가 얼마나 행복한지가 우선이다. 서로에게 이유를 묻고 공감하고 응원한다.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만 개인의 역량과 판단은 개인의 사적인 부분으로 넘긴다.
ENTJ와 ISFP의 궁합은 '맞는 것 안 맞는 것 반반' 이란다. 정확하다. MBTI를 신봉하지 말라하지만 생각보다 잘 해석해준 것 같다. 다 맞출 필요도 억지로 끼워 넣을 필요도 없이 저 정도의 중간 선을 유지할 수 있는 게 개인적으로 최고의 파트너가 되는 길 같다.
이번 매거진을 통해서 우리를 해석하고 우리 주변의 연인들을 관찰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기회를 가졌다. 우리는 완벽하지도 품위 있지도 않은 그런 사람들이지만 매거진의 제목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혼은'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알아가고 싶다. 적어도 현실적이지만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싶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결혼은 생각보다 무서운 게 아니니까.
메인 사진 제공 : MBTI 유형 해석- 뚝딱뉴스